목회자와 신학자는 진리의 문제 앞에서는 타협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옳습니다. 특히 구원의 문제나 교리적 문제에 있어서는 강경한 신앙적 신념을 가지는 것이 성도들에게도 좋고, 목회적으로도 건강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교파주의에 얽매여 타인을 악마화하거나 타교단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부실한 상태에서 무조건적 비판을 가하는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최근 전(前) 교황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가열찬 공격을 퍼붓거나 저주를 퍼붓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이기 때문에 그런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를 따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신학적 비판도 정당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인격에 대해서 근거 없는 루머와 악의적인 공격은 신학적 교만이나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서, 라칭거는 탁월한 신학자였으며,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자들보다 전통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했던 인물입니다. 우리 개신교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어도 가톨릭 교회 안에서만큼은 좋은 지도자였고, 그의 신학이 어떤 면에서는 개신교 내 자유주의 신학자들보다는 건강했습니다. 이런 배경과 상황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신학적으로는 예리하게 분별하되 복음적이고 목회적 관점에서 관용을 베풀 수 있는 부분에서는 아량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한국의 몇몇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이들이 보이는 행태는 교단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를 병들게 만듭니다.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 안에 거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교리에 대한 명확함과 복음 안에서 타인을 수용할 수 있는 신학적 융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파주의에 경도된 몇몇 개혁파 장로교 사람들이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오순절 등의 교단을 이단시하거나 적대하는 행위는 개혁주의 신학의 고고함과 순결성을 보여주기보다는 폐쇄성만을 부각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면 교파주의의 아픔을 극복하고 개신교회가 복음적 기치(에반젤리칼) 안에서 관용(에큐메니칼)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장로교에서 감리교 신학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와 공격 중 대표적인 것이 웨슬리 구원론에 대한 부분입니다. 웨슬리 신학 연구소의 임성모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존 웨슬리는 구원론을 확립하는데 대단히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신학에 능통했고, 성경/초대교부/종교개혁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마침 종교개혁자 후예들의 문제점, 즉 정적주의자들이 루터를 곡해하고 하이퍼칼비니스트들이 칼빈을 곡해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제대로 된 구원론을 만드는데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의 변질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주권 강조가 인간의 열심을 무력화하지 않고, 예정론이 결정론화되어 신자를 태만과 방종으로 이끌지 않는 구원론, 즉 성경적 구원론을 회복하길 원했다. 구원받은 신자가 구원받은 신자답게 사는, 다시 말하면 구원과 구원의 열매가 연결되는 구원론을 제시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 은혜다. 구원받은 신자 삶의 총체적 과정(회개, 칭의, 성화, 영화)을 하나님 은혜가 이끈다.
2. 신자는 하나님 은혜를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반응해야 한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 은혜다.
3. 구원의 과정에서 나태하지 않고 성숙할 수 있도록 늘 자신을 경계하고 훈련한다.
4. 개인주의적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교회적 신앙을 중시한다.
5. 구원받고 훈련받은 신자는 전도, 선교, 봉사에 전심을 다한다.
6. 구원받은 이가 타락하는가? 물론 흔들리고 죄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이가 구원에서 제외될 수도 있는가? 영원히 타락하는 이는 애당초 구원받은 자가 아니다.
7. 예정론을 반대했는가? 웨슬리는 이중예정론이 결정론에 빠지는 것을 반대했을 뿐, 예정론 자체를 반대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 감리교인이든 칼빈주의자든 웨슬리 생각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 웨슬리는 바울, 모세 등 하나님의 일꾼들에 대한 예정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구원론에서 예정론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이퍼칼비니스트와 다른 종류의 예정(웨슬리 말을 빌리면, “another branch of the true gospel predestination”)을 말한다. “신자의 성화와 하나님 영광을 찬양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 예정론이 웨슬리가 믿는 예정론이다. 웨슬리의 에베소 1장 12절 주석에 나오는 말이다.]
이처럼 웨슬리가 분명히 예정론을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예정이라는 용어보다는 은혜라는 말을 더 빈번하게 사용하기는 하나) 반대하는 듯이 말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자들의 연구 부족과 교파주의에 대한 입장 때문입니다. 또한 감리교 내부에서도 원전 연구를 철저히 하지 않고 자유주의신학에 물든 이들이 2차 자료를 주로 의존하기에 서로 오해가 발생합니다.
이와 거꾸로 감리교나 오순절 교단에서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부족한 이해로 그들의 신학적 위상과 가르침을 터부시하거나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칼빈을 제네바의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악성 루머나 예정에 대한 구원 교리를 적대하는 태도는 칼빈과 장로교 개혁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실제로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칼빈을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그가 잔혹한 살인마라고 왜곡되고 날조된 역사기록을 가지고 한국교회 전체를 적대합니다. 이런 모습은 틀림없이 교파주의에 얽매여서 타교단을 적대하는 행위에서 비롯된 잘못된 태도입니다. 『칼뱅은 정말 제네바의 학살자인가?』(세움북스)의 저자 정요한 목사는 자신의 저서 44페이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칼뱅 시대 제네바에서 종교 문제로 처형을 당한 사람이 세르베투스 한 사람이라는 주장에는 많은 연구자들도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제롬 볼섹이나 카르텔리옹처럼 칼뱅과 다른 신학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추방당한 경우는 있었습니다. 사실 추방당한 두 사람의 경우도 평범하지는 않았습니다. 제롬 볼색은 칼뱅의 예정론을 거부하고 결국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칼뱅이 죽은 뒤 13년 후에 『칼뱅의 생애』라는 책으로 온갖 악랄한 거짓말을 퍼뜨린 장본인이었습니다.]
칼빈과 웨슬리는 시대가 달랐고, 각기 다른 시대에서 복음의 열정을 한껏 불태운 신앙의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후예들이 서로 반목하고 악의적으로 헐뜯는 것은 이단자들에게 즐거운 일을 보이는 것입니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개신교회 입장에서 당연히 로마 가톨릭과의 일치를 주장하거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부들의 신학적 유산과 세속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그들의 전통적 방법론은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교파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복음뿐입니다. 이제 시대가 바뀌어서 다음 세대 사역자들은 교단을 초월하여 강단을 교류하고 교제하며 협력합니다. 오로지 복음 안에서만 이런 역사와 넉넉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신학적 입장은 존중하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는 자리에는 감리교 장로교 오순절 성결교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김요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