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작가들의 말말말>

도서 「설교와 단상」

말씀이 한 편의 설교로 탈바꿈하는 것은 지난 20여 년간 제가 몸담아온 성경번역선교사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 원어와 독자, 그 어느 언어권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사람에게 석의(釋義)와 번역은 양쪽 모두 늘 버겁고 두려운 과제입니다. 그나마 지금은 고국에서 청중과 비슷한 문화 배경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지만, 말씀을 그들에게 유익한 영의 양식으로 전하는 과정은 번역 못지않은 긴장을 유발합니다. 아니 어쩌면 더 어려운지도 모르겠습니다. 파푸아의 왐본 주민들은 번역된 말씀이 생애 처음으로 그들의 가슴에 와 닿는 하나님 말씀인지라, 새로운 책을 건네줄 때마다 말씀을 이해하려 그들 스스로 적지 않은 열심을 내곤 했습니다. 그러나 고국에서 설교를 듣는 청중은, 넘치는 말씀과 다른 방도로도 말씀을 접할 흔한 기회 때문에 마음이 느긋해서, 제대로 말씀을 만나려면 전달자의 노력이 수배나 더 필요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장홍태 – 설교와 단상

도서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사람이 성장할 때는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히거나 채우려 하지만, 충분히 비우는 것으로도 그 기틀을 마련하기도 합니다. 목사 된 지 겨우 1년 된 서른여덞 살의 부목사가 그 삶의 무게를 덜어 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억해 내고 그려 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얼마나 위태로웠는지 또는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그 짧은 생의 이면에도 드러나는 지키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경륜은 놀랍습니다. 이런 하찮은 인생의 기억도 하나님께서 쓰신다면 순종할 뿐입니다.

김진혁 – 느그 아부지 뭐 하시노?

도서 「어서 와, 공공신학은 처음이지?」

성경은 복음이 우리의 영혼만 구원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과 직장 내 관계가 새로워집니다. 복음의 총체성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내 속에 내주하시는 그분의 심정과 시선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까닭입니다. 이전에 애지중지했던 것이 시시해지는가 하면, 이전에 무시했던 이들을 존귀히 여기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삶의 주인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살전 1:9).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행 9:18). 복음의 광활함이요, 부요함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음의 무게요, 범위요, 능력입니다(엡 3:18,19). 저의 간절한 소망은 이 책을 통해 많은 분이 이 복음의 부요함을 맛보고, 일상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주님의 기대를 따라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세상의 소망이자, 영광의 현장이 되길 소망합니다.

황경철 – 어서와, 공공신학은 처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