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전통 종교적 교훈이 관습과 윤리와 법의 기본을 이룬다. 서구에서 동성애에 대한 전통적 교훈은 기독교에 기원한다. 서구에서 동성애를 법적으로 (사형에 처할 만큼) 범죄시 한 것은 1530년대 영국의 헨리 8세가 Buggery Act를 만들었을 때부터였다. (당시 buggery는 남자들의 동성애, 항문성교. 수간 등을 의미했다. 당시 레스비언이라는 개념은 없었다) 19세기 말 독일에서 동성애가 의학적으로 병이라는 생각이 퍼지기 시작하였다. 동성애다 종교적 죄, 범죄 그리고 정신장애라는 개념은 동성애자로서는 억압이었다.
그리하여 동성애자를 인권차원에서 해방하려는 운동은 19세기 말부터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정신과의사이자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M. Hirschfeld가 이 운동을 주동하면서, 동성애는 병이 아니라 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일차성혁명 시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다소의 관용이 생겨났다. 그러나 1933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동성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Hirschfeld의 성연구소는 파괴되었다.
이차세계대전 동안 젊은이들이 도시에 몰려들면서 동성애자들의 공동체가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전후 1946년 암스텔담에 The Cultuur en Ontspannings Centrum (COC, “Culture and Recreation Centre”)이라는 게이 조직이 생겨났다. 미국에서는 1950년 공산주의자이며 노동운동가였던 Harry Hay의 주도로 LA에 Mattachine Society가 결성되었다. 그 창설자들 대부분이 공산주의자들로서, 미국공산당(the Communist Party of the United States. CPUSA)이 사용하는 세포조직 같은 활동 방식을 채택하였다. 1955년 산프란시스코에서 레스비언 공동체인 The Daughters of Bilitis (DOB)가 결성되었다. 1961년까지 여러 도시에 이들의 분회가 조직되었다.
이런 동성애자들의 조직들이 게이해방운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마침 1950년대부터 미국에서는 매카시선풍에 대한 반동으로 노동자해방운동, 흑인 인권운동, 여성인권(해방)운동,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식민지해방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사회정치적 분위기 속에 자연스레 게이인권운동이 편승하였다. 동성애 단체들은 1960년대 이래 공개적으로 동성애자 인권운동과 연방정부의 각종 차별정책에 대항하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동성애(게이) 해방운동은 공산주의적 방식으로 시작하였지만, 당시의 반공산주의 사회분위기 때문에, 보다 완화된 인권운동 방식으로 바뀌어 갔다.
새로운 게이해방론자들은 이전의 전통적인 게이의 행동방식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과거에는개인의 동성애를 비밀로 보호하면서, 이성애적 규범에 대한 저항은 반대 성의 역할 표현 등 상징적으로 암호화되어 표현되고 있었다. 커밍아웃은 물론 자신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가 알려지는 것은 그들이 매우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이르러 동성애 활동가들은 커밍아웃을 정치적 전략의 중심에 두었다. 이 전략은 동성애자들이 감정적으로 자신들의 삶에 전적으로 관여하게 하고 게이해방운동에 참여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게이해방론자들과 조직들은 주로 게이바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동성애가 여전히 법적으로 범죄였기 때문에, 게이바는 빈번하게 경찰의 습격을 받았다. 특히 항문성교가 발각되면 징역형을 받게 하는 반소도미법(anti-sodomy law)이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한 게이 교사가 어린 남학생을 동성애자 모집(recruitment)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보고, 이를 극히 범죄시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이후 동성애자 인권운동의 선두에 역시 공산주의자였던 Frank Kameny(1925–2011)가 주도하는 워싱턴의 Mattachine Society가 있었다. 그들은 우선적으로 반소도미법을 없애려고 활동하였다.
한편 성혁명의 새로운 프리섹스 풍조는 게이들로 하여금 게이바, 목욕탕, 섹스클럽 등에서 “손쉬운 섹스“(easy sex)를 추구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장소들은 다른 사람들이 침범하거나 채포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없는 안전한 공간으로, 동성애자들이 쉽게 많은 섹스 파트너를 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게이 소설가 Brad Gooch에 의하면, 1970년대는 “성문란의 황금시대”(the "Golden Age of Promiscuity") 였다. 게이공동체는 책무(commitment)나 장기적 헌신적 관계가 없는 비인격적 섹스 내지 무책임한 성문화를 발달시켰다. 많은 게이들이 비인격적 섹스를 모험적이고 다양한 섹스 경험을 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으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비인격적 섹스가 피상적이고 값싸고 또는 병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고, 대신 재미있고 즐거운 그리고 흥분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처럼 20세기 성혁명에서 프리섹스 풍조는 동성애운동(게이인권운동)과 서로를 견인하면서 진행되었다. 호모섹슈얼리티도 헤테로섹슈얼리티와 같은 섹슈얼리티의 하나로서, 자유롭게(프리하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이들의 문란한 섹스관이 이성애자 섹스 문화에도 영향을 주어 프리섹스나 캐주얼 섹스를 더욱 조장하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프리섹스와 게이해방운동은 마약사용을 중개로 자연스럽게 서로 연결되었다. 이제 무한한 성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더 이상 특이한 성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들이 “혁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크리스천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깨달아야 한다. 즉 역사적으로 20세기 동성애운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하였다는 사실, 60년대 동성애운동은 동성애의 언더그라운드 하위문화와 1960년대 청년들의 급진적 반문화운동과 프리섹스문화의 결합이라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구에서의 반문화운동은 반기독교적 정치문화운동이었다는 사실 등등이다.
#민성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