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 하지 않았던가

오피니언·칼럼
사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3년 8개월이 지나도록 국회가 대체 입법을 마련하지 않는 바람에 낙태 무법천지가 돼 가고 있다. 처벌할 법적 근거도, 어디까지 허용할지 명확한 기준도 없는 상태에서 위험한 불법 낙태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헌재가 ‘낙태죄’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건 지난 2019년 4월이다. 헌재는 이 결정과 함께 2020년 12월까지 국회에 보완 입법을 주문했다. 하지만 국회가 4년이 다 되도록 제 할 일을 하지 않는 사이에 불법 낙태약에 의존해 태아를 죽이는 끔찍한 범죄가 횡행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상당수가 병원 대신 찾는 게 값싼 낙태약이다. 그런데 이런 약은 대부분 해외 직구 형태로 국내에 들어오는 것들로 식약처 허가가 안 난 제품들이다. 문제는 이렇게 불법 유통되는 약을 구입해 복용한 상당수의 여성이 출혈 등 크고 작은 부작용을 경험한다는 사실이다.

낙태를 결심한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망치고 더 나아가 목숨까지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런 불법 낙태약을 찾게 되는 건 단지 비용의 문제만은 아니다.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많은 병원이 명확한 기준이 없는 탓에 시술 자체를 꺼리는 문제도 생겨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이처럼 목숨을 건 불법 낙태가 판을 치게 된 건 예고된 불행이라 할 수 있다. 헌재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할 때부터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가 벌어지게 될 걸 예견했다. 더구나 조속히 대체 입법을 마련해 혼란을 막아야 할 국회마저 4년 가까이 손을 놓고 있는 사이에 생명을 훼손하는 낙태가 음지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게 된 것이다.

지난 2020년 10월 법무부가 임신 14주까진 임신부의 결정으로 낙태를 허용하자는 개정안을 냈다. 질환이나 성범죄 등의 경우엔 24주까지 허용하도록 했다. 이 개정안에 대해 당시 야당인 국민의 힘에선 낙태 허용 기간을 더욱 줄이는 법안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낙태죄를 전면 폐지하는 법안을 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여야가 바뀌었어도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법안을 발의한 그 상태에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아예 당과 국회 차원에서 합의점 도출을 위한 논의조차 없는 채로 그대로 멈춰섰다. 태아의 생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임에도 당장 내 표에 도움이 안 된다는 안일함이 아니라면 이토록 무책임할 순 없다.

그러는 사이 ‘낙태죄’는 사문화되고 낙태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낙태죄’ 폐지 이후 2020년 한 해 동안 인공임신중절 건수가 32,063건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드러난 공식 통계일 뿐이다. 그동안 광범위하고도 은밀하게 시행된 낙태까지 포함하면 불법 태아 살해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낙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뿐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이 결부된 문제다. 헌재가 ‘낙태죄’를 ‘위헌’이 아닌 ‘헌법불합치’로 결정한 것도 무조건 낙태를 허용한다는 뜻이 아니라 태아의 생명을 최대한 보장할 방법을 찾으라는 주문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논의와 여론 수렴으로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할 방법을 찾는 노력을 하루라도 빨리 재개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합계 출산율 0.8명의 초저출산 국가이다. 소위 MZ세대들이 결혼 출산 등을 포기하는 현상이 계속되면 우리 경제는 50년 뒤 아시아에서 필리핀에도 뒤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에서 뱃속의 태아마저 국가와 사회가 보호하지 못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저출산 극복 대책도 백약이 무효해질 것이다.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결심하는 요인 중 아무래도 사회경제적 문제가 가장 크다 할 수 있다. 임신 출산 등으로 여성이 고용 등에 있어서 불이익을 겪는 문제는 반드시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단지 그것뿐일까. 우리나라는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차별 의식이 남아있다. 이런 현실에서 여성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면 모든 책임을 떠안게 되고 그때부터 주위의 차가운 시선과 냉대를 오롯이 견뎌야만 한다.

이런 문제는 국가가 제도적인 뒷받침을 한다고 달라지기 어렵다. 그러므로 종교계, 특히 한국교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여성이 마음 편히 출산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고 양육을 도와야 할 것이다.

지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기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모든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일깨워주셨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소중함보단 주의의 냉대가 두려워 낙태를 고심하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이들의 마음의 번민을 나눠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고귀한 생명을 낳아 키울 수 있는 마음의 결단을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며, 실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말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 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