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국 교수(백석대 실천신학)가 29일 복음과 도시 홈페이지에 ‘용서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렸다. 최 교수는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에토스 함양에도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이어 “용서는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피해자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고 용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며 “용서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스런 감정을 수반하는 프락시스(praxis)”라고 했다.
그러나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용서를 말하고 베푸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용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라며 “예수님이 말한 용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통하여 단지 윤리적인 의무만을 강조하게 될 때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될 수 있다”며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의 역동을 간과할 때 흔히 발생한다”고 했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분별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다”며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지평만이 아니라 사법적(judicial), 심리적(psychological), 그리고 관계적(relational) 지평까지 포함하는 매우 역동적 주제이다. 사법적 용서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주체이며, 피해자의 부정적 긍정적 감정인 분노와 분개와 자비 등과 관계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즉 가해자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용서”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를 단순하게 윤리적 프락시스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며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마 18:22)”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이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용서의 당위성과 윤리적 실천만을 강요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게다가 피해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적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다짐해도 미움과 정죄와 분노가 떠올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인간은 상처나 피해를 받으면 분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며 “피해자의 마음의 치유 없이 용서의 실천만을 강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은 윤리적 차원이나 관계적 차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상황적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용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자가 되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의 정신과 용서하는 자세를 함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보상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 보상이나 이익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치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최 교수는 “진정한 용서는 틀에 박힌 정형화된 공식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며 “진정한 용서는 자유로움의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다. 용서는 그 특성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역동성을 지닌다.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자 관계적이고, 개인적 문제이자 공동체적이며, 역사적 문제이자 상황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모든 용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용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며 “용서를 개인의 분노와 분개의 차원이나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가해자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했다.
그는 “용서는 단지 피해자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다. 즉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라고 했다.
이어 “용서와 분노 같은 감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양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라며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의 분노나 상처가 완화되고 치유될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 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언어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인간의 용서는 의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며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해도, 상처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가 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지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서의 부정적 긍정적 반응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용서를 개인의 의지적 결단과만 관련시킬 때 정서적 상처로 인하여 용서가 쉽지 않은 사람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며 “따라서 용서의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정서적 여정과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나아가 광의적인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문제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의 실현의 문제와도 관계된다”며 “데이비드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참된 용서는 단지 개인의 화해(reconciliation)의 과정에 이르는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생명력과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용서의 참된 초점은 개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소나 착함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대인 관계의 화해, 온전함과 생명을 함께하는 것에 있다’(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 6-7)고 말했다”고 했다.
아울러 “그가 보는 참된 용서의 의미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위성에 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가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격려와 용서의 가능성에로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있다”며 “이런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이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복음을 실현해내는 여정과도 관계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