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등지는 젊은 층이 늘어나고 있다. 단순한 코로나 팬데믹 후유증으로 여겼던 한국교회에 진짜 비상등이 켜진 셈이다.
3년여 이어진 코로나 방역 시국에 가장 고통을 받은 게 영세 자영업자였다. 이들은 당국의 계속된 통제와 규제로 생존의 절벽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지난 정권 말부터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차츰 일상이 회복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게 됐다.
반면에 교회는 갈수록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시작했던 온라인 비대면 예배가 비상시국의 대안이 아니라 아예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에 대한 당국의 규제가 풀린 후에도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르는 교인들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다.
한때 한국교회 부흥의 꽃이었던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추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부터다. 최근 한국교회 주요 교단이 총회에 보고한 통계자료에도 적시돼 있다. 코로나가 큰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나 모든 게 코로나 탓만은 아니다.
통계청이 2015년에 조사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기독교인은 증가하는데 20~24세의 청년 교인은 급격하게 준 것으로 나타났다. 같은 기간 중 여성 청년이 2만여 명 줄어든 반면에 남성 청년은 13만 명이 줄어 감소율이 무려 35%를 기록했다.
교회마다 청년들이 급격히 줄어드는 원인을 한두 가지로 진단하긴 어렵다. 일제 강점기와 6.25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대와 민주주의가 세워지던 사회변혁기, 또 지금 MZ세대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취업과 진로, 결혼, 육아 등 현실적인 고민의 방향성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장년 노년 세대들이 교회를 통해 부족한 걸 채우고 은혜로 교회를 든든히 지켜왔다면 지금의 청년 세대는 교회에 대한 그런 애정과 소속감이 덜하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성령의 체험과 이끌림 없이 부모의 손을 잡고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해 평탄하게 자아가 성장한 세대에게 교회는 그만큼 객관적인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요즘 교회 청년들에게서 영적 갈망을 찾아보기 어렵단 말은 아니다. 교회를 지키는 청년들뿐 아니라 떠나는 청년들에게도 내적 갈등과 번민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문제는 영적인 갈구의 정도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바라는 걸 다 채워주지 못하는 교회의 구조적 속성에 있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가 지키고 있는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교회력에 따른 절기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죽음, 부활, 승천 및 재림 등을 통해 완성된 구원의 역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느 때부턴가 이런 절기마다 특별헌금을 거두는 데 더 비중을 두는 듯하다.
‘추수감사주일’만 해도 그렇다. 한국교회가 빠짐없이 지키는 이 절기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이주, 정착한 후 농사를 지어 그 수확물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 유래됐다. 그런데 당시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감사예물을 드리고 땅을 내주고 농사를 도와준 이웃인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니까 추수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이지만 그 은혜를 나눈 건 이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추수감사절의 진정한 의미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되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종교를 통틀어 기독교만큼 사회봉사와 구제에 많은 힘을 쏟고 있는 곳이 있느냐는 자부심과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감사를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요즘 교회 청년들은 교회가 오랫동안 관행처럼 해 온 일들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정도가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출석하는 교회가 감사를 실천하는 것보다 교회를 더 크고 든든하게 세우고 유지하는 데 더 힘을 쏟고 있다면 청년들의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만약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교회를 떠나는 청년들이 늘고 있다면 이는 “난 이 교회의 일원이 될 생각이 없다”는 적극적인 의사 표시일 수 있다.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당회, 집사와 권사까지 포함된 제직회 등 교회가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의사 결정기구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디에도 청년을 위한 교회는 없다는 현실이 교회 청년들을 ‘가나안(안나가) 교회’로 내모는 한국교회의 구조적 현실이다.
청년이 없는 한국교회에 미래는 없다. 유럽교회가 먼 나라 남의 일이 아니다. 더 늦기 전에 교회가 뼈를 깎는 갱신의 자세로 구태와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교회가 속절없이 떠나는 청년들의 등을 쳐다보며 한숨지을 게 아니라 그 원인을 찾아 개선하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