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이어령 교수는 마침내 온누리교회의 하용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는다.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만약 민아(딸)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 있게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당시 이어령 교수의 회심 사건은 화제를 불러왔다. 평소 그를 잘 알고 있던 지인들은 ‘이어령이 세례를 받고 예수를 영접하다니!’와 같은 반응을 보이며 미심쩍어했다.
오랜 세월 기독교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이어령 교수의 그리스도 영접 사건은 큰 환호와 함께 많은 의문도 제기 받는 큰 이슈가 되었다.
어떻게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한 가지 때문이다. 자식 때문이라면 못할 게 없기 때문이다. 자식만 살 수 있다면 아무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 그게 바로 부모의 심정이다.
이는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회당장 야이로의 사건과 너무도 흡사하다. 회당장은 회당 건물과 가구와 두루마리 성경을 관리하는 자들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이런 이가 당시 이단의 괴수로 취급 받았던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 꿇었다고 하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기독교의 한 총회장이 신천지 이단의 교주인 이만희 앞에 굴복하는 거나 다름없는 일에 해당되었을 것이다.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소중한 직분을 박탈당하고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단의 괴수라 여겨지던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유는 뭘까? 다 자식 때문이다. 딸이 다 죽어가고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유일한 가능성이 있다면 예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식의 생명보다 부모에게 더 중요한 건 없다. 그렇다. 자식 앞에 장사가 없다.
그렇게 믿음과 신뢰로 출발한 야이로에게 시간이 흘러기면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선은 예수님을 만나려고 인산인해로 모여든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의 발걸음이 지체가 되면서부터 야이로의 믿음과 신뢰는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혈루증 앓다가 예수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고침 받은 여인으로 인해 야이로의 믿음과 신뢰는 한껏 떨어져버린 상황이다.
그때 예수님은 혈루증 여인을 살려주시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변함없는 지속적인 믿음과 신뢰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을 야이로에게 남기시면서 그의 딸을 죽음에서 살려내신다.
예수님의 걸음이 방해하는 이들로 인해 지체되자 야이로의 마음이 예수님과 그들에게로 분산되어버린다. 그렇게 마음이 둘로 갈라지니 그 결과 ‘의심’, ‘염려’, ‘두려움’이 생겨버린 것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치유 기적은 크고 지속적인 믿음과 신뢰로 받을 수 있다. 제자들은 늘 예수님으로부터 ‘신뢰부족’(little faith)이라는 핀잔을 거듭거듭 들었다. 작은 믿음, 작은 신뢰로는 기적을 행할 수도 경험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에겐 큰 믿음과 신뢰가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기적 사건을 먼저 보여주신 후 야이로에게 교훈을 남기신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말이다. 기적이 일어나기까지, 지속적이고 크고 단순한 믿음과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내게는 이런 믿음과 신뢰가 있는지 점검해보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