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학술원(원장 이신열 교수)이 1일 오후 고신대학교 은혜관에서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번역’이라는 주제로 제17회 종교개혁 기념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칼빈 신학의 대가인 엘시 안나 맥키 교수(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가 ‘신학자 요한 칼빈이 스스로 번역하다: 1541년 「기독교 강요」 속의 목회자 요한 칼빈’이라는 주제로 발제했고, 황대우 교수(개혁주의학술원책임연구원)가 번역했다.
맥키 교수는 “요한 칼빈은 개신교 신학자로서 종교개혁의 주도적 목소리로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그의 가장 유명한 책 ‘기독교 강요’가 현대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라며 “칼빈 자신이 평생 목회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자신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는 쉽다. 우리는 이 두 부르심 사이의 단절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칼빈이 사람들에겐 설교를 제공하고 학자들에겐 신학을 제공하려고 했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 라틴어 ‘기독교 강요’의 저자 칼빈은 동일한 책의 번역자이기도 했다. 칼빈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도 교수들과 동일한 생각에 접근하길 원했던 것”이라며 “칼빈도 탁월한 지식인이었고,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 청중에게 적합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강요’는 거의 항상 최종판으로 읽혀지는데, 1559년의 라틴어판과 1560년의 불어판이 그것이다. 이것은 당연하다”며 “왜냐하면 칼빈 스스로 최종판이 자신의 선호 형태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책이 거의 24년 동안 여러 번 기록되고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중요한 것을 잃게 된다”며 “그동안 칼빈 자신은 젊은 지식인에서 목회자로, 목회자들의 교사로, 그리고 개혁파 신학자들의 지도자로 발전했다. 그 책에 대한 자신의 목적 또한 이 번잡한 목회 연수 동안 발전했고 청중들도 바뀌었다”고 했다.
맥키 교수는 “‘기독교 강요’는 다섯 개의 주요 판본이 있었다. 첫판은 여섯 장으로 구성된 소책자였는데, 1536년에 출간되었으나 1년 전에 완성되었다”며 “이 책의 의도는 일반적으로 프랑스와 유럽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위해 새로운 ‘개신교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라틴어로 저술되었지만 일종의 교리교육서였다”고 했다.
이어 “1539년에 ‘기독교 강요’로 돌아왔을 때 칼빈은 자신의 목적과 청중을 변경했다. 당장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목회자들을 위한, 즉 기초는 알지만 개신교 가르침의 완전한 개요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였다”며 “이 때 그는 ‘기독교 강요’를 번역했는데, 이것이 1541년에 출간한 최초의 불어 ‘기독교 강요’다”라고 했다.
또 “1559년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 최종판을 출간했으며, 1560년에는 그것을 불어로 번역했다. 이 1559~1560년판은 훨씬 크고 완벽하게 재배열되었다”며 “칼빈이 두 가지 언어로 ‘기독교 강요’를 출간한 이유는 라틴어는 모든 지식인들의 글쓰기와 대화의 보편적인 도구였으며, 서구유럽 전역에서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실제로 개신교 종교개혁 때까지 공식적인 신학이 통용되었던 유일한 언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불어 “개신교도들은 신자의 제사장직을 주장하면서부터 토착 언어로 신학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칼빈이 불어로 저술하기 시작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어휘들을 더욱 풍부하게 개발하는 노력이 필요했다”며 “대다수의 사람들, 즉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시도했던 사람들에게는 불어를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신학자 칼빈은 또한 목회자 칼빈이다. 이것은 그의 설교에서뿐만 아니라, ‘기독교 강요’에서도 분명하다”며 “자기 자신의 라틴어판 번역자로서 칼빈은 불어판 ‘기독교 강요’를 목회자들을 위한 최초의 개혁주의 지침서로 만들었다. 그의 본문에 대한 면밀한 조사가 증명하는 것처럼 제네바에 추방된 목회자는 자신이 프랑스에 남겨두었던 동료 신자들에게 매우 주의깊게 돌보고 있었다”고 했다.
또한 “이 조국의 청중과 소통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주요 신학 서적을 아주 특별한 방법에 의한 맞춤 본문으로 만들었다. 그들에 대한 어떤 업신여김도 없이 그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자료를 만들었고 의식적으로 모든 신자들, 즉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포함했다”고 했다.
아울러 “칼빈의 말들이 증명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그가 자신의 청중이 그리스도인으로 ‘십자가 아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점인데, 그들은 교육뿐만 아니라 격려도 필요했다”고 했다.
한편, 이어서 ‘칼빈의 조직신학서 「기독교 강요」: 필자의 1559년 라틴어 최종판 번역에 즈음해서’라는 주제로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가 발제했다.
문 교수는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를 정점으로 하는 초대교부들의 정통성을 견지하며 그들의 신학을 계승하고 심화해서 정립하였고 그것을 후대에 전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가교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했다”며 “칼빈신학은 단순히 이전의 것을 답습하거나 모방한 신학이 아니었으며 성경의 진리 그 자체를 성경적 방식으로 탐구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점에서 가히 정통신학의 정점에 있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모두를 유일한 계시주(啓示主)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긴 점, 성경의 영감(inspiratio)과 함께 증언(testimonium)을 강조한 점, 율법과 복음 및 신구약에 대한 논의를 기독론 안에서 전개한 언약신학,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위격적 연합과 그에 따른 위격적 사역 및 그 가운데서의 속성교통론, 전적 은혜와 오직 은혜의 객관적 · 직접적 속죄론, 칭의와 성화의 이중적 은혜, 성찬의 영적 임재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적 연합 가운데서의 현존 등에 대한 이해는 선구적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우리는 칼빈을 조직신학자로서, ‘기독교 강요’를 조직신학서로서 합당하게 바라보게 되며, 칼빈주의자들과 ‘맞서는(against)’ 칼빈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안에(with-in)’ 있는 칼빈을 만나게 된다.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그런 칼빈을 그려 내는 최고의 붓(筆)이자 최고의 묵(墨)이라 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