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연구소(소장 이성덕 교수)가 26일 오후 배재대 아펜젤러기념관에서 ‘닷지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주제로 제1회 아펜젤러연구소 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먼저, ‘아펜젤러의 활동과 교육사상’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서영석 교수(협성대)는 “헨리 닷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는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20여 년간 한국 땅에서 활동한 선교사”라며 “헨리 아펜젤러는 일찍 소천한 아버지 아펜젤러의 못 다한 학교 사업을 이어받아 배재학교에서 교장으로 섬기면서 일제강점기의 뼈아픈 세월을 보내면서 한국인들을 위해 가르치는 선교사역을 펼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대를 이어 한국 땅에서 선교사로 섬기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아펜젤러의 신앙적 결단과 부름의 소명으로 인해 젊음의 세월을 바치고 배재학교의 발전에 온 힘을 기울였다”며 “부자 선교사의 교육사업, 즉 배재학교에서의 헌신은 배재의 역사와 한국의 근대 교육사에 깊이 각인이 될 정도로 뜻 깊다”고 했다.
그는 “배재대 설립자 아펜젤러가 처음부터 기독교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한국인들에게 근대적 교육을 시키는 것이라 확신하고 학교사업에 매진했다”며 “그 노력의 결과 배재는 지속적으로 발전했다. 설립자 아펜젤러가 소천한지 20여년 만에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와 우여곡절 끝에 제 5대 교장이 되어 학교를 맡아 운영하며 놀라운 발전을 꾀했다. 그야말로 배재는 근대문화와 교육의 발상지로서의 역할을 해왔고, 나아가 한말 항일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민족저항운동의 거점의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어 “3·1만세 운동 때를 비롯하여 6·10만세사건, 광주학생운동 때에 배재학생들은 침묵하지 않았고 민족문제에 깊게 관여했다. 이때 아펜젤러는 학교와 학생을 지키려는 자세로 잘 견뎠다”며 “그는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학교의 체제를 정비해갔으며, 배재학교를 통해 민족의 자도자,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개화기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근대 교육이 필요로 하는 시기에 아펜젤러 교장은 배재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또 “아펜젤러는 교육의 근본 목적이 결국 기독신앙인을 만드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신앙집회나 성경공부에 있어서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며 “선교사이며 복음전도자란 자의식이 강했던 아펜젤러이기에 교육의 목표도 기독인재 양성에 있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의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배재의 역사와 한국의 근대교육사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두 번째로 ‘아펜젤러의 생애와 사상: 1940~1953년의 생애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소요한 교수(감신대)는 “닷지 아펜젤러의 삶은 교육선교사, 목회자, 구호 봉사자, 미군정 특별고문 등 다양한 모습으로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시기를 살다갔다”며 “그의 사상을 살펴본다면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늘 ‘하나님 앞에 선 나’라는 것을 세속적인 목적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강조했다는 점”이라고 했다.
특히 “그의 설교를 보면 일의 외형적인 조건과 방법을 제시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유를 질문하는 근본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라며 “그의 삶은 우리나라를 스쳐지나간 세속적인 서구인과는 다르게 한국 선교에 있어 다양한 역할을 위의 목적으로 실천했다. 또 그의 교육 이념과 인재상도 그가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한국인을 양육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는 세속적인 성공과 야망을 이루는 기독교인이 아닌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한국인을 양육하는 것을 바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그는 “헨리 게르하르트 아펜젤러의 설교집은 1세대 선교사답게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강조하기 위해 구체적인 성경구절의 인용과 반복, 합리적인 통계 등을 이용한 것에 비해 닷지 아펜젤러는 신앙인의 삶의 자세를 세속적인 관점이 아닌 신앙인의 관점으로 성찰했다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이어 마지막 세 번째로 ‘아펜젤러의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발제한 최청순 박사(배재대)는 “닷지 아펜젤러는 3년간 노구를 이끌고 동분서주하면서 피난민 과부와 고아들을 돌보다가 결국 백혈구 부족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고, 전쟁 중 광견병에 걸린 개에 물린 여파라는 주장과 악성 빈혈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위독한 상태로 미국으로 돌아가 숨을 거두었다. 아펜젤러와 그 아들이 대를 이어 사회복지의 기본이념인 봉사와 헌신의 정신을 한국 땅에 새겼던 것”이라며 “일정강점기라는 시기에 배재의 교장으로 봉직했던 닷지 아펜젤러의 당시 사회계몽적인 시각과 시도들이 한국의 근대적 사회복지의 시초가 되었다”고 했다.
아울러 “6.25 전쟁 당시 전후복구, 구호사업에 있어 실제로 사회복지실천의 영역으로 이어지면서 오늘날 한국 사회복지발전에 초석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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