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한 일을 많이 베풀어 주시고 그로 인해 신자에게서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됩니다. 그러나 고난이 닥치면 그분의 영광을 찾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불만까지 생깁니다. 문득 만약 고난에 그분의 영광이 전혀 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너무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존재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고는 알지만 여전히 마음으로는 흔쾌히 정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과연 무엇이며 신자가 그분께 영광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답변]
예수님 이전의 영광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을 뜻하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어로는 ‘카보드’, 헬라어로는 ‘독사’인데 세상 모든 피조물과는 전혀 다른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완전성과 탁월성을 뜻합니다. 특별히 당신께서 신자에게 임재하실 때에 찬란한 빛이 동반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영어로는 glory, 한글로는 영화로운 빛(榮光)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를 인간은 결코 상면할 수 없습니다. 추악한 것과는 단 일초도 공존하지 않으시는 완전한 선이신 그분의 존전 앞에 죄로 찌든 인간이 서면 당장 소멸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매개체를 통해서 혹은 천사를 대신 보내어서 인간을 만나주십니다.
대표적인 예로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또 시내 산을 덮은 구름이나 이스라엘의 성막위에 머문 구름을 통해 당신의 임재를 보여주시고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24:16, 40:35) 그러다 성자 하나님 예수는 사람이 직접 뵙고 만나도 죽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임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보여주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회심시킬 때에 실제로 영광스런 빛 가운데 임재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실제적인 임재 앞에 서게 되면 엄청난 경외감에 사로잡혀서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며 그분의 처분만 기다리며 겸손히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자 자기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으로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듯이 말입니다.(사6:3) 그런 고백을 받으신 하나님은 진노의 형벌 대신 은혜의 구원을 베푸시고 당신의 자녀와 종으로 세워주십니다. 그럼 넘치는 감격과 기쁨으로 저절로 그분을 향해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에서 결정적으로 완전하게 실현되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감당하시고 구원해주시는 은혜는 인간은 상상도 못할 하나님만의 완전한 의이자 탁월한 선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에서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헬라어로 영광-‘독사’의 타동사형 ‘독사조’, 영어로 gloryfy로 번역됨)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라고 기도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주님이 이제 곧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부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감당하심으로써 성부와 성자 모두가 영화롭게 된다고 합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사실상 당신의 가르침, 섬기는 사역, 기적들, 그리고 십자가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는데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그분이 자기 땅에 왔는데도 자기 백성들이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9-18) 사탄은 자기 종들을 충동시켜서 주님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으나 사탄의 그 모략마저 당신의 영광을 온 천하에 완전하게 드러내려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진리의 영, 성령님이 오셔서 제자들로 십자가에 드러난 그 영광의 실체에 대해 정확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주님이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십자가 구원의 의미를 풀어서 성경으로 저작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밝힌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기에 필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온전히 계시된 것입니다. 거기다 신자에게 그 진리를 잘 분별하여 자기 삶에 반영할 수 있도록 성령님이 평생토록 내주해주십니다. 신약시대에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하나님이 굳이 매개체나 천사의 모습으로 신자에게 영광 가운데 임재 해주실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역이 이뤄지기 전이었고 성경도 완비되지 않았으며 성령님도 일시적 부분적으로만 역사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통으로 계시하거나 직접 임재해서 당신의 뜻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던 때와 신약시대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예수님 이후의 영광
바꿔 말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개념을 바꿀 필요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단순히 당신의 위엄과 권능을 과시하려고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특별히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뜻과 계획을 밝혀서 보여주기 위해서만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신약성경으로 당신의 뜻이 온전히 계시되었으니까 더 이상 가시적인 존재로는 거의 임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신약신자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 영광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그분의 그분다우심을 절감하면 바로 그분을 대면한 것이고 그분의 영광도 가시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영적으로 접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일어난 어떤 일이 하나님이 아니고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그분의 역사라는 확신이 들면 사실상 그분을 대면한 것입니다. 맨 처음 성령으로 거듭날 때부터가 그러합니다. 신자는 인식하지 못해도 연약한 피조물인데도 그분의 주권적 택함을 받아서 거부할 수 없는 그분의 불가항력적인 구원의 은혜를 입는 것부터 그분의 영광이 강력하게 임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성령의 중생의 은혜를 입은 신자는 자연히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에게 이런 구원의 크신 은혜를 베푸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아주 뛰어난 업적을 쌓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을 대면해도 “제게 너무나 큰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 나를 만나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그런 차원과도 비교조차 안 되는 너무나 고귀한 은혜이므로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올리게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배 중에 십자가 은혜를 감사하는 찬양을 부른 후에 성도들은 진심으로, 단순히 종교의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영광의 박수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만의 탁월함과 완전함입니다. 신약시대에는 눈에 안 보이지만 그분의 영광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더 빈번하게 신자에게 비춰집니다. 대표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깨닫고 소름이 끼치도록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 깨달은 대로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고 계신다고 절감하면 감격은 두 배로 늘어납니다.
예배, 설교, 성경공부, 찬양, 기도, 성도교제, 전도나 선교,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봉사, 이웃 사랑, 사회적인 선행 등등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 반드시 그분이 함께 동행해주십니다. 신자도 지금 그분이 분명히 나와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특별히 자신이 전혀 계획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더 확실히 인식되고 그분의 뜻까지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그 자리에 엎드리고 눈물이 절로 흐르도록 감사와 경배를 돌리게 됩니다. 영광이라는 히브리어 카도사는 원래 ‘무게’나 ‘중압감’이라는 뜻인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임재하면 강력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기에 영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일어나는 고난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입니까? 이 또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통해서 당신다우심을 드러내신다면 그분의 영광이 함께 한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신자의 죄나 잘못으로 일어난 고난이라면 고난 자체에 그분의 영광은 없습니다. 죄 자체의 부작용과 폐해가 고난으로 닥쳤고 신자로서 그분의 징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 잘못으로 인한 고난 중에도 신자가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그 잘못을 고쳐나가면 하나님이 고난을 없애주고 더 거룩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그런 구원을 인식하고 자신의 회개마저도 당신께서 간섭해주신 은혜라고 확신하면 그분의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그분께 한층 더 깊어진 감사 찬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욥처럼 믿음을 성숙시키기 위해서 또 아브라함처럼 열방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 쪽에서 의도적으로 신자에게 연단을 겪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 이해도 못하며 하나님께 원망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 끈질기게 기도하며 그분과 영적인 씨름을 해나가면서 그 연단의 의미를 깨닫고 잘 순응하면 고난 중에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대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하든 신자가 진정으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동행을 이어가면 그분의 영광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로 그분을 만나서 영광을 보려고 간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영광을 돌리는 방법
그럼 신약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접한 신자는 자연히 감사 찬양 경배를 돌리게 된다고 이미 말씀드렸지만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다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 때에 기도하신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또 성자로서 성부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전부 십자가에 죽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런 정도의 핍박은 없으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십자가에서 절정으로 드러났기에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뜻을 자신의 삶에 구현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다스리는 목적과 방향은 오직 하나입니다.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는 것입니다. 창조 때부터 신구약시대를 거쳐서 마지막 날까지 인류의 전 역사는 십자가 구속사입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으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한 명이라도 구원 받을 때에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게 여기고 또 신자가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일에 기여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 개인의 인생이나 그가 속한 공동체에 현실적으로 풍요를 주던 고난을 겪게 하던 당신만의 구속역사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신자가 겪는 어떤 고난이라도 그런 방향으로 그분의 역사가 임하면 그분의 영광도 함께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가 단지 현실적 축복을 받고 그에 상응한 감사헌금 혹은 교회봉사를 더 많이 한다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고난을 겪게 했으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틀린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이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10:31-33)
‘그런즉’이라고 시작하니까 바로 앞에서 설명한 내용과 연결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시중에 파는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서 가르쳤습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고기가 귀해서 우상 신전의 음란한 예배에 바쳐진 후에 판매되었습니다. 신자로선 그런 고기를 사먹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우상 자체는 실존하지 않으니까 그에 바쳐진 것도 아무 의미가 없으므로 신자는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믿음이 그 정도까지 확고하지 않는 연약한 신자나, 우상이 있다고 믿는 주변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가 자기들 계명을 위반한다고 비방할 가능성이 있다면 먹지 않는 것이 좋다고 권면했습니다. 신자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나 좋은 일을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서 또 복음 전파에 방해되지 않도록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그런 위험이 있다면 평생 동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후에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라고 말했기에 바로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처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습이나 의식에 따른 경건한 행동보다는 오직 십자가 복음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가 단순히 도덕적으로 선행을 많이 하고 종교적 활동을 많이 한다고 해서, 특별히 하나님께 헌금 헌물을 많이 바치고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뜨겁게 행한다고 해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모습이 드러나야만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삶과 하는 일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주변에 전파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부터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며 그분이 이 땅에서 살았던 삶대로 사는 것이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믿음이 연약한 신자는 그런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 삶의 여러 측면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를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심과 완전하심을 있는 그대로 순전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 일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라고 인식할 수 있다면 그분께 진정으로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 인식이 안 되어 당장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라도 반드시 그분만의 거룩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최소한 그분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진리 하나라도 겸허하고도 확고하게 인정하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고난 중에 원망과 의심을 앞세우기 보다는 그분의 뜻을 묻고 또 묻는 것부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2022/8/4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박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