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은 구원 받았나?’ 질문을 받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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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입니까? 눈치보기입니까?
김요환 목사

우리의 목회는 선교적 사명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이 비그리스도인들 눈치 보기가 되어선 안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종종 비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갔을까?, 착하게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등과 같은 난처할 만한 물음을 받습니다. 성도는 이런 질문을 피하기보다는 논리적인 언변과 따뜻한 억양으로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다, 지나치게 교리적 타협을 보거나, 교회 안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성경 해석에서 너무 많이 벗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4장 12절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는 말씀과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틀림없이 구원의 특수성과 유일성을 강조하는 본문입니다. 비그리스도인들이 이 본문에 대하여 배타성을 느끼고, 거부감을 느낄까봐 복음의 선언적 측면을 외면해선 안 됩니다.

종종 선교지에서는 타종교가 지배적인 환경이기에 어쩔 수 없이 종교다원주의적인 접근으로 원주민들에게 접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그런 전략적 접근을 두고 ‘선교’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곧 복음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적 접근은 비그리스도인들이나 타종교인들에게 호감을 살지는 모르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교리를 고수하며 복음을 전하기에는 오히려 역효과입니다. 결국 다원주의적 사고를 갖고 선교지에 나가면, 복음은 전하지 못하고 타종교만 탐구하다가 끝나기 일쑤입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는 틀림없이 비그리스도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생각하여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비그리스도인들이나 타종교인들의 눈치를 보다가 복음의 정수를 뚜렷하게 말하지 못하면,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를 받고 낙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지극히 옳지만, 반드시 공동체의 가치와 정체성을 고려하고 준수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중학교 시절 가족 중 한 분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임종하셨습니다. 그 주 주일에 교회학교 전도사님께 “우리 가족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돌아가셨는데, 천국 못 가나요?”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때 그 전도사님이 융통성 있게 위로해주면서 말씀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의 지체도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천국에 갈 수 없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이 말을 들은 저의 마음에는 상심이나 낙심보다는, “앞으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천국 백성이 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도록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물론 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시켜서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임종한 이들은 모두 지옥에 갔다고 단정하듯 말하면 어떤 유족들에게는 상처로 다가올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도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듣는 이는 상처로 받습니다. 목회자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을 맞이한 유족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어야 하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따스함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적 본질은 불신 영혼을 전도하여 교회 공동체로 초대하는 것이고,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는 것에 있습니다. 제 중학교 시절 담당 교역자는 그 당시 저의 기분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교리적 가르침을 줌으로써 오늘날까지 저의 목회적 초심의 초석을 주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배려’와 ‘눈치 보기’는 다릅니다. 복음의 진리는 타협 불가한 지점이 있고, 분명하게 선언해야 할 특수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설득력 있는 접근을 위해서 합리적 말하기와 감수성 깊은 공감의 말하기가 만연합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변증만 성행하면, 주지주의로 흘러가게 되고, 복음의 본질에서 멀어질 위험이 다분히 큽니다.

투박하고 유치해도 “예수님 만이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메시지는 절대 사수해야 할 진리의 선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학이나 이념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에 있습니다. 타종교인들의 시선에서 기독교는 사건(사실)에 연연해하는 유치한 종교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은 인간 실존과 사상 체계를 뛰어넘어 오늘의 현실이 되어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신앙 진리입니다. 과거 역사 속에 나타난 사건(십자가와 부활)이 오늘 우리 영혼을 구원하는 현재적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십자가와 부활)은 다가올 종국에 나타날 영원한 처소를 보장하는 미래적 사건으로서도 영원토록 유효합니다.

이 진리는 타종교인이나 비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인들만이 이해하고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 우리의 선교적 언어는 지금 성도의 이 권리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같이 누리자고 말할 뿐입니다. 그들이 믿기 전까지 이 경험을 맛보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교부 키프리아누스의 말처럼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습니다. 기독교적 선교와 변증은 아테네와 예루살렘을 연결하는 작업이 아니라, 아테네에 살고 있는 이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기독교 신앙을 수호하고 변증하며 선교해야 할 사명을 망각한 체 그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만 인기만 끌기 위해 복음의 메시지를 희석하고 있습니다.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가장 위대한 배려는 그들의 기분을 고려하며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를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정직하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폭력과 강압으로 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복음을 손에 들고 있는 사명자가 당당함을 잃어버려서도 안 되겠습니다.

김요환 목사(구성감리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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