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작가 ‘꽤 괜찮은 해피엔딩’ 주제로 강연
“불행 당한 사람이 아닌, 불행 만났지만 잘 헤어진 사람으로 살게 하셔
인생이 너무 힘들 때 쉬어는 가지만 중간에 그만두는 일 하지 않길”
“사고 이후 완전히 삶이 달라지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제 시각에도 완전한 변화가 생겼어요.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하나님이 시나리오를 쓰시고 감독하시는 영화에서 나는 출연자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만들어지는 이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그리는 영화가 끝까지 잘 만들어지도록 한 신 한 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지’, ‘하나님의 계획에 나를 동참시켜주시는 것이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러면서 오히려 더 자유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원래 성격이 어땠나’, 그런 것도 굉장히 많이 물어보세요. 평균치에서 봤을 때 조금 더 밝은 사람이었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좋아하고 즐겁게 사는 사람이었지만, 때때로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쭈글쭈글할 때도 있었고 아주 평범한 사람이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대단히 강인하게 어떤 일이 와도 무적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킬 것이고 그 가운데 또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강연자이며, 현재 6년 차 교수로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이지선 교수(44)가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로 강연을 이어 나갔다. 이 교수는 2000년 여름, 스물셋에 뜻하지 않게 만난 교통사고로 전신 55%에 3도 중화상을 입었다. 이후 40여 차례 고통스러운 수술을 이겨낸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희망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이 교수는 이화여대 유아교육과를 마친 후 미국 보스턴대 재활상담학 석사, 컬럼비아대 사회복지학 석사, UCLA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지금은 한동대 상담심리 사회복지학부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지선아 사랑해’, ‘오늘도 행복합니다’, ‘다시 새롭게, 지선아 사랑해’에 이어 지난 4월에는 10년 만에 ‘꽤 괜찮은 해피엔딩’을 펴냈다.
지난달 24일 서울 은혜제일교회(최원호 목사, 국제독립교회연합회 소속)에서 열린 행복한 우리동네 북콘서트 ‘매.마.토.2’(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2시)의 강연자로 초청된 이지선 교수는 참석한 이들에게 인생의 고난과 시련이 있더라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저마다의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있다는 희망의 선물을 나눠줬다. “잠 오기 딱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니, 정신 바짝 차려야 이번 시간이 순삭(순간 삭제)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친절한 멘트와 함께 강연 내내 유머와 위트, 긍정 에너지로 웃음도 선사했다.
이 교수는 대학교 4학년 때 음주운전 차량에 받쳐 그와 오빠가 타고 있던 차가 7대의 차와 부딪힌 후 불이 나면서, 그의 몸에도 불이 붙는 사고를 겪었다. “병원에서 빨리 작별 인사라도 하라고, 금방 갈 거라고 해서 저희 오빠가 저에게 ‘잘 가라. 좋은 동생이었다’고 인사까지 다 했는데 아직까지 안 가고 저는 살아 있다”며 웃었다. 이 교수는 “사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 중환자실에 들어갔을 때는 산소호흡기도 끼워져 있었고, 폐에 찬 유독가스를 빼내는 튜브도 옆구리에 꽂아 있었다고 한다. 의식 없이 누워 있었는데, 제 얼굴도 모르시는 권사님들, 집사님들께서 이 청년의 어려운 소식을 듣고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중보기도를 해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말했다.
“혼자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폐가 회복되면서 산소호흡기를 뗐어요. 몇 시간 후 간호사님이 오랫동안 호흡기를 끼고 있었으니까 물을 넘길 수 있는지 한번 확인을 해보자면서 제 입에 빨대를 물려주셨어요. 저는 너무 많이 부어 있어서 눈도 떠지지 않을 때였는데, 깜깜한 중에 입 안으로 물이 넘어 들어오는데, 그 와중에 그 물이 너무 시원하고 맛있는 거예요. 살면서 맹물이 맛있다고 생각한 처음 순간이었어요.”
이 교수는 “제가 그 물을 마시고 나서 살아남기 위해서 거쳐야 할 시간들은 그때는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어렵고 힘든 시간이었다. 그 시간들을 지날 때마다 ‘사는 건 죽는 것보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구나’, ‘살아남는 건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시간들을 지날 때마다 사고 후 처음 마셨던 물 한 모금을 기억했다. “살아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 너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일, 아무 의미도 즐거움도 없는 아주 사소하고, 그래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긴 많은 것이 사실은 어마어마한 기쁨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힘든 시간마다 그 기쁨에 대해 집중하면서 그 길을 지나오게 되었어요.”
이 교수는 입원 당시 사진을 보여주며 “피부가 없어졌기 때문에 붕대를 대신해서 감아놨지만, 붕대가 피부의 역할을 다할 수 없어 매일 소독을 받아야 했다”며 “시간이 흐르면 다시 생겨나는 재생능력을 피부가 갖고 있는데, 3도 화상을 입은 부위들은 재생능력을 이미 잃어버렸다는 뜻이어서 다치지 않은 피부에서 떼어다가 이식 수술을 해야 했다”고 말했다. “적어도 수술을 받으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다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기다렸어요. 그런데 한번 불이 지나간 자리는 자꾸 줄어들고 당겨지는 성질을 갖게 되었고, 얇은 표피를 그 위에 이식하고 나니 같이 쪼그라들고 수축이 일어나는데 그 당겨지는 힘이 얼마나 센지 수술을 다 마치고 퇴원을 할 때 이미 변형이 오기 시작했어요. 목에 이식한 피부가 쪼그라들기 시작하면서 턱을 당겨 내렸고, 입을 다물 수 없게 됐어요. 입이 안 다물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침을 흘리게 되었고, 수건을 물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는 “어느 토요일 오후에 너무 재미있다고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라며 “사고 전과 똑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제 삶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버렸구나, 아무리 더 애쓰고 견뎌도 그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마음에 절망이 찾아왔고,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였다고 말했다. 하나는 아파트 옥상을 찾아서 올라가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몇 시간 고민하다 따져보고 싶은 마음에 교회에 갔다.
“도대체 어쩌실 작정이냐고, 살려놨으면 대책이 있을 거 아니냐고 제가 따지고 울었어요. 몇 시간을 울고 따지고 했는데 아무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그분이 좀 그런 스타일이시잖아요…. 그냥 울다가 기도 아닌 기도를 하다가,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어요. 다음날 주일 아침에 교회에 왔을 때, 제가 함께하던 성가대가 찬양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밑에서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를 하고 흘러내리는 침 때문에 계속 수건을 갈아 끼워가면서 정말로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져 버릴 것 같은 살을 안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그냥 여기가 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지선 교수는 “더 떨어질 바닥도 없고 나는 더는 할 수 없다, 내게 주어진 미래라는 건 들어가면 더 깜깜해지기만 하는 동굴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더는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너무나 강하게 들면서 찬양도 부르고 싶지 않았고 목사님 설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앉아서 ‘내 인생에 이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나버렸는데, 하나님 혹시 정말 계획이 있어서 내가 이 삶을 계속해야 하는 거라면 하나님 계획이 뭔지 나도 좀 알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래야 나도 좀 살아볼 수 있지 않겠냐’고 마지막과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어요.”
예배 후 목사님이 그의 옆에 와서 ‘사랑하는 딸아’라고 시작되는 기도를 했다. 그 자신조차 사랑할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르셨다. “저 목사님 딸 아니거든요. 저를 사랑하는 딸아 부르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시간 목사님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때 하나님은 그 목소리를 통해 저를 위로하면서 두 가지를 약속하셨어요. 저를 ‘세상 가운데 반드시 다시 세우겠다’고, ‘또 병들고 힘들고 약한 자들에게 네가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할 거다’라고 하셨어요. 사실 제가 기다렸던 약속이 아니에요. ‘이 얼굴 다 회복될 거야’, ‘다 제자리로 금방 돌아갈 거야’를 제일 기다렸는데 그 말씀은 아니시더라고요. ‘여기가 끝이 아니라고, 네 인생에 준비된 다른 해피엔딩이 있다’고, ‘지금 이렇게 그만두고 싶어 보이는 상황이지만 너를 위해 해피엔딩을 준비했어. 조금만 더 견뎌주겠니’ 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때부터 다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해피엔딩을 살아보기로 하고, 주어진 오늘 하루를 살아가자고 마음먹었어요.”
이 교수는 “그때부터 저는 ‘오늘살이’,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사람으로 매일 살고 있다”며 “집에 돌아와서 단 한 번도 상상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일이 일어났던 8개월간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음에 조금씩 용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거울을 보는 일이었다. “처음 거울 앞에 섰을 때 너무너무 어색했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니까, 어색하기도 하고 사람 처음 만나면 인사하라고 배웠으니 ‘안녕’ 인사하고 쓱 지나가고, 또 보면 인사하고, 자꾸 보니까 정드는 얼굴, 그렇게 생겼더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얼굴에 익숙해져 갔고, 이제 이 얼굴이 내 얼굴이구나, 제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이 교수는 어렵고 힘들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함께한 가족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며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가장 따뜻하고 좋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제가 제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나누면 많은 분이 되게 성격이 낙천적인 것 같다, 의지가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제가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제 모습을 인정하고, 책 제목처럼 ‘지선아 사랑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는 저를 ‘사랑하는 딸아’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제 모습이 이렇게 많이 달라졌는데 저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지 않은 저희 가족들, 교회 식구들, 교회 친구들이 있어서 그 사랑 안에서 제 자신을 사랑으로 안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서 “제가 제 이야기를 짧게 나누다 보면 멘탈이 정말 대단하다는 오해를 좀 받게 되는 것 같다”며 “평범해 보이지 않으시겠지만, 아주 평범한 사람이다.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하고, 마음이 이쪽저쪽으로 막 휩쓸려갈 때 제 주변에 하나님의 말씀이, 또 고마운 사람들의 응원들이 다시 제 마음을 모으게 해주었고, 그 힘으로 매일 하루를 잘 넘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종종 글을 써 올렸던 홈페이지에 사진을 올리면 중간중간 ‘솔직히 지선 씨가 무섭고 징그럽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 솔직한 반응을 보고 있는 그의 마음은 또 무너져 내렸다고 토로했다. “‘나 이렇게 생겼구나, 이렇게 보이는구나, 이게 사실인가 봐’라며 마음이 막 바닥으로 떨어지는 그때, 그전까지 깨닫지 못했던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어요. 단 한 번도 제가 거울을 보면서 제 얼굴이 무섭다고 징그럽다고 생각된 적 없었던 것, 이게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들인가 생각이 들었어요. (사고 이후) 제가 덤으로 산다고 말했어요. 시장에서 사과를 샀는데 주인이 하나 더 얹어주는 그 사과가 조금 부서졌거나 멍든 사과라도 덤이니까 그저 고마운 것이잖아요. 제 마음에 그런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어요.”
이 교수는 “저도 사실 다 보인다. 얼마나 울퉁불퉁한 피부를 가졌는지, 얼마나 다양한 색깔을 가졌는지 다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대로 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바라보시는 그 눈, 저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눈으로 제 흉터를 볼 수 있었던 것이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더라”며 “남들만큼 그렇게 솔직하지 않은 마음, 어쩌면 남들만큼 그렇게 밝지 않은 눈이 선물로 와 있었던 거였던 거구나, 매일 매일 기적처럼 그 눈으로 저를 볼 수 있어서 그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스피노자의 윤리학 책에서 감정, 특히나 고통스러운 감정은 그것이 무엇인지 묘사하고 설명할 때 더 이상 고통이기를 멈춘다고 했다”며 “제가 그랬던 것 같다. 한 발짝 떨어져서 제 삶에 일어난 일을 마치 기자처럼 정리하고 묘사하다 보니, 더 이상 그 고통 가운데 있지 않았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다 보니 하나님의 은혜도 발견할 수 있었고, 그러다 보니 이식한 피부 위로 튀어 올라온 딱 하나 자라난 그 눈썹을 발견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나님이 주신 그 회복, 그 기쁨에 대해서 제가 이전에 몰랐던 기쁨을 훨씬 더 강도 높게, 훨씬 더 자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고백했다.
“보다시피 제가 여러분과 다른 손을 가지고 살아요. 손가락 끝이 말단부위이다 보니까 불이 1~2초만 더 오래 머물러도 살리기가 어려운 부위예요. 그래서 정리하는 수술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처음에는 감각이 너무 이상해요.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라 부드러운 천만 스쳐도 정말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로 너무너무 아팠어요. 그 당시에 이 손으로 어느 것도 만질 수 없으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겠구나 했는데, 재활훈련을 거치면서 점점 감각, 신경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고, 꼼짝도 하지 않았던 피부가 재활훈련 거치면서 다시 펜을 잡고 글씨를 쓸 수 있게 됐고 컴퓨터 자판도 두드릴 수 있게 됐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나아지는 것들에 대해서 크게 기뻐하면서 그 시간들을 홈페이지에 글로 기록했어요.”
이 교수는 “요즘같이 누구나 다 자기의 이야기를 SNS로 많이 하던 시기였다면 제가 그렇게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는 좀 쉽지 않았을 것 같다”며 “특이하게 제 흉터, 제 이야기를 아주 솔직하게 꺼내 놓았더니 사람들이 많이 읽어주셨다”고 말했다. 어느 날 책이 출판되고 일본어, 중국어로도 번역돼 출판됐다. ‘나도 해리포터처럼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나’라고 기대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감사하고 좋은 일들이 참 많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세상의 고통이 화상의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친구들, 가족들에게조차 꺼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우리 인생에 쌓이게 되고 그 흉터들, 상처들이 곳곳에 남아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있으신 분들에게 제 책이 전해졌다”며 “책을 읽으신 분들이 저에게 다시 편지를 보내오셨다. ‘살아남아 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제가 나눈 것은 어쩌면 너무너무 불쌍한 여자의, 아주 기구한 운명 속의 불쌍한 여자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다시 살아갈 힘, 다시 살아갈 용기를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쓰고 계시는구나를 알 수 있었어요. 사고 이후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고, 아픈 와중에 저를 향해 내밀어준 손이 얼마나 따뜻하고 좋은 것인지 알게 되었고, 교회와 지역 사회, 가족이 내밀어준 그 손을 잡고 일어섰을 때 ‘나도 이렇게 따뜻한 손 내밀 수 있으면 좋겠다’, ‘나도 여기 좀 내밀어줄 손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품게 됐어요.”
그래서 이 교수는 사회복지를 전공하고 한동대에서 사회복지를 가르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대단치는 않지만 현재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제게 만나게 하신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일들을 하고 있다”며 “최근에 홍보대사로 있는 푸르미재단에서는 IoT 기술을 접목한 농장을 설립했다. 발달장애를 가지고 있어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더 이상 직장을 갖기 어려운 청년들에게 일다운 일자리를 만들어 평범한 삶을 실현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일하는 31명의 장애인 근로자를 대상으로 일다운 일이 주는 의미가 얼마나 큰지 논문을 통해서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또 수용자 자녀를 돕는 아동복지실천회 세움을 소개하며 “아이들이 부모의 죄를 같이 뒤집어쓰지 않도록, 아이들의 마음을 보듬고 건강한 성인으로 잘 자랄 수 있도록 어른들이 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연구들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지선 교수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사고는 ‘당한 것’이 아니라 ‘만난 것’이었다. “‘사고를 당했다’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인데, 언젠가부터 ‘사고를 당했어요’, 혹은 ‘사고 당한 지 몇 년이 됐습니다’라고 표현하는 문구가 좀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 왜냐면 사고를 당했다라고 말할 때마다 제 자신을 ‘음주운전 교통사고의 피해자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피해자로 살고 싶지 않았고, 실제 하나님께서 피해자로 살게 하지 않았어요. 물론 잃어버린 것도 많고 당한 피해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저 피해자로 살게 하지 않으셨어요. 삶의 많은 선물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행복, 기쁨들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제가 제 입으로 피해자로 이야기하는 게 좀 불편했어요. 그래서 말을 좀 바꾸어 ‘사고를 만났다’고 했어요. 당한 일의 결과는 피해일 수 있는데, 만난 일의 결과는 헤어짐일 수 있더라고요.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보니 제가 사고를 만났지만 잘 헤어진 사람으로 살게 됐어요.”
이 교수는 마지막으로 참가자들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살 것을 당부했다. “인생의 어려움들,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그래서 막을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이 생기기도 해요. 그런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들, 어쩌면 꿈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그런 일들이 우리 인생에서 맞닥뜨려질 때 누군가는 ‘너는 불행을 당했어’, ‘재앙과 같은 일이 벌어졌네, 쯧쯧쯧’하고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향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을 계획하시고, 우리 인생을 다시 쓰게 하시는 분임을 기억하면 좋겠어요. 인생이 동굴처럼 느껴지던 시간 속에서도 그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잘 지나왔을 때, 인생은 터널이고 언젠가 이 길 끝에 빛이 기다리고 있는 것, 그것이 우리 인생에 준비된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외에도 이 교수는 푸르메재단 홍보대사로서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 경험을 전했다. ‘이제 그만두어야겠다’라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던 그때 한 한국 여성이 ‘EZSUN 파이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가 그를 알아보고는 ‘이지선 파이팅’이라고 응원했다. “처음 본 분이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었고, 저기까지 올 거라는 보장을 저도 하지 못했는데 저를 응원해주려고 기다리신 분을 만나고 고마워서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사진을 찍었어요. 사람이 양심이 있지 어떻게든 발을 다시 떼서 옮기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질질 끌고 왔던 다리에 새 힘이 났어요. 나머지 7km를 그 힘으로 얼마나 힘차게 걸어갔는지 모릅니다. ‘나 저분처럼 살 거다’, ‘인생의 마라톤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나도 응원하면서 살아야지’, ‘응원의 힘이라는 게 어마어마한 거구나’를 체험하면서 7시간 22분 26초의 기록으로 마라톤을 풀코스 완주하게 됐어요. 꼴찌나 다름없었지만 결승 라인을 통과하는 제 마음은 1등이 나만큼 기뻤을까 그랬던 것 같아요.”
그는 “정말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고 진짜 더 가면 죽을 것 같이 느껴지는 고비들이 있었는데, 가만 보니까 죽을 것 같은 거지 죽는 것이 아니었다”며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나를 사로잡는 것이지 결코 이 레이스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그만두지 않는 한 이 레이스는 계속되는 것이구나’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저와 여러분에게 각자의 마라톤이 주어져 있어요. 지금 얼마나 왔는지, 또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사실 더 어려운 것이 인생이라는 마라톤 같아요. 살다 보면 죽을 것 같은 고비들을 만나기도 하고, 저처럼 한번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보장도 돼 있지 않아요. 여기가 천국이 아니니까요. 죽을 것 같은 고비들을 만날지라도 중간에서 그만두는 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이 길 끝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나 그래도 내 사명 다하고 돌아왔다고, 적어도 그 끝을 내가 정하지 않았다고,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그 말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는 말을 이어갔다. “늦으면 어때요, 저 꼴찌여도 너무 행복했거든요. 우리 너무 힘들 때 쉬어는 가지만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오늘 여러분의 인생의 마라톤을 중간에 노란 피켓 든 그분의 마음으로 응원해드리고 싶었습니다.”
한편, 이날 강연에 앞서 유충식 재즈피아니스트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안개’(영화 ‘헤어질 결심’ 주제가)와 본인이 작곡한 ‘칸나’를 열정적으로 연주하여 박수를 받았다.
최원호 은혜제일교회 목사는 “실제로 간증을 듣는 것이 지금까지 읽은 책의 모든 감동보다 100배는 더 다가온다”며 “하나님의 기적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은혜제일교회는 오는 10월 29일 오후 2시에는 CCM 사역자 박종호 장로를 초청해 은혜로운 찬양콘서트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