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디옥에서 로마길을 타고 유럽으로 간 서방 선교를 바울이 이끌었다면 안디옥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아시아로 간 동방선교는 네스토리우스가 이끌었다고 하겠다. 386년 안디옥에서 출생한 네스토리우스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주교로 임명되면서 교회의 지도자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신학적 논쟁으로 페르시아로 망명했던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따르던 콘스탄티노플 교회 교인들은 페르시아로 이주하였고, 기존의 페르시아교회가 네스토리안 신앙 교리를 받아들임으로 자연스럽게 네스토리안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 네스토리안 교회를 시리아교회 또는 동방교회(동방정교회가 아니다)로 불렸다.
네스토리안교회가 주도한 해외 선교는 활발했다. 500년에는 남 아라비아 라즈란족을 선교했고, 5세기 말에는 페르시아에 7개의 대주교 관구가 조직될 정도로 성장했는데 페르시아가 아랍에 정복되고 이슬람의 박해가 시작되던 636년까지 계속됐다. 중앙아시아 선교는 498년 투르키스탄, 헤프탈라이트 훈 종족과 오쿠스강 북쪽 선교에 나서던 때부터다. 520년에는 간지스강 유역의 훈족과 터크족, 위커족 및 티벳족에게 복음 선교를 시도하였고, 6세기에는 바이칼 호로부터 동 시베리아까지 뻗혔다. 1050년에 옹구트족에게 전해진 복음은 1250년에는 위커족까지 이르렀다. 1374년에는 우즈베기스탄의 사마르칸드어로 예배서가 번역되었으며 16세기에는 쿠르디스탄에 크리스챤을 볼 수 있었다. 1885년 러시아령 투르키스탄에서 네스토리안의 묘비를 발견함으로 이곳에 복음이 전해진 것을 확증했다. 1312년에 세워진 무덤에는 "바삭의 무덤이다. 생애의 목적은 예수 우리 구세주"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또 다른 묘비에는 "사제 타키의 묘이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매우 열정적이었다"고 적혀있다. 유네스코가 확인한 키르키스탄에 있는 네스토리안교회 터는 당시 네스토리안교회가 남긴 유산의 중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인도와 인도네시아 선교는 3세기 이후 9세기까지 네스토리안 크리스챤을 핍박한 캐톨릭 교회와 이슬람의 핍박의 결과였다. 핍박을 피해 이주하던 네스토리안 크리스챤들은 인도로 이주하면서 480년에 성 호르미스교회를 설립하고 500년에는 에남마부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503년에는 성 죠지교회를 세웠고, 510년에는 유다얌페로레 교회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1293년 마르코 폴로가 인도에서 발견한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였던 도마의 묘비에 새겨진 네스토리안 십자가는 인도선교를 입증한다. 복음은 인도에 머물지 않았다. 520년에는 인도 남부 세일론을 지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중국에 전해진 경교가 네스토리안교회다. 공덕과 효용이 뛰어나게 밝은 종교라고 해서 경교라고 불렸던 네스토리안교회는 635년 알포펜과 21명의 선교단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서청미시소경, 세존포세론, 존경, 경교삼위몽도찬 등이 번역된 가운데 당시 중국 당나라의 수도였던 장안에 건립된 네스토리안 교회였던 대진사에는 목탁을 치며 하루에 네 차례 예배가 있었고, 중국 당나라 내 10도와 385주에 경교사원이 건립되기에 이르렀다면 네스토리안교회의 전성기라고 보면 되겠다.
1625년 제수잇선교사가 발견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는 본 비를 건립하던 781년 당시 네스토리안 교회의 성직자와 네스토리안 교인으로서 공직자인 숫자 만도 128명이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중국 과찬에 건립되었던 10세기의 네스토리안 교회의 수도원 터나 4피트 높이의 성수대 등은 경교의 융성을 증명한다. 845년 외래종교 금지가 발효된 후 황소의 난이 발생한 879년에는 20만 명의 경교도를 헤아렸다. 경주에서 발견한 8, 9세기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십자무늬장식과 손을 입에 물고 있는 어린아이를 무릎위로 안고 있는 불보살상이나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돌십자가는 통일신라에 경교가 전래되었다고 단정하기 보다는 경교가 중국 당나라에서 왕성했음을 반증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기독교 동진사의 권위자인 고르돈(E.A. Gordon)이 1917년에 금강산 장안사 부근에 백대리석으로 된 대진경교 유행중국비의 모조비석을 세운 이유는 한반도에 경교가 전래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자신의 한국 경교 전래 연구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네스토리안의 몽고 선교는 7세기부터다. 1007년에는 케라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왠귀드, 카라키탄 등 몽고부족에게 네스토리안 선교사가 파송되었다. 1009년에는 케라이트 투르크의 20만 명이 네스토리안으로 개종했다는 기록이 있다. 1167년 징기스칸의 원나라 황실에 경교신자가 많았던 것은 복음의 확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1368년 원의 패망은 경교의 쇠퇴를 촉발시켰다.
네스토리안 선교사는 극동아시아의 끝인 일본에도 724년에 네스토리안 의사 선교사가 입국함으로 선교 사역이 시작되었다. 783년 천황을 알현했다는 당나라 사람 황보와 그를 따라 나선 밀리스 선교사의 행보는 단순 방문 이상의 선교 사역으로 보겠고, 중국 당나라를 방문한 후 9세기에 모조 중국경교비를 제작한 일본인 고보 다이시는 경교신자로 보인다.
위에서 본대로 네스토리안 교회의 해외 선교는 실크로드의 주변 국가를 상대했음을 알게 된다. 네스토리안 선교사중 특별히 소그디안 출신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는 실크로드를 따라 이동하였고, 이들이야 말로 실크로드를 만든 장본인들이고, 이들이 실크로드의 실제 주인이었다고 본다. 이들은 로마와 중국을 연결했고, 안디옥에서 로마길과 실크 로드를 만나게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 투루키스탄, 시베리아,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몽고, 만주, 일본 등으로 추진된 이들 네스토리안의 선교사역의 결과로 11세기에 와서는 세계에서 가장 멀고도 가장 넓게 복음을 전파한 기록을 세웠다.
목회자 선교사나 선교하는 수도승들을 따라 나선 실크로드 상인들이 네스토리안 선교의 주체였다. 이들 시리아나 페르시아 또는 소그디아나 출신의 네스토리안 상인들은 실크로드 주변 국가를 상대로 무역을 하면서 복음도 전했다. 이들을 상인선교사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인이라는 뜻의 페르시아 말 '트그르'가 '선교사'라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당연했던 것은 네스토리안 상인들이 복음 선교사였기 때문이다. 4세기 시리아교회가 불렀던 찬송 중에 "상인들처럼 잘 준비된 여행, 우리는 세상을 구원한다. 사람을 나에게로 인도하여 가르쳐 창조를 채우라"는 가사는 실크로드를 따라 무역 길에 나선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의 무역과 선교 사역을 떠올리게 한다.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들이 상인이면서도 복음을 파는 선교사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물품과 복음을 동시에 판매하는 상인선교사로 보면 된다. 이들에게는 선교와 무역이 이위일체라고 하겠다. 선교가 복음을 팔고 무역이 상품을 판다고 할 때 선교와 무역이 별도의 상품을 팔기 때문에 이위여야 하지만, 선교와 무역이 복음전파라는 동일한 목적을 추구했다면 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들 상인선교사는 물건을 팔면서 복음도 팔았다는 말인데 무역과 선교는 연속행위로 보았다. 선교의 가능성은 무역의 논리에서 엿볼 수 있다. 상인선교사 편에서 볼 때 서양의 상품을 수출한다면 서양의 종교인 복음도 수출할 수 있다는 논리다. 고객 편에서 볼 때 재래 상품과 수입 상품이 공존한다면 전통신앙과 기독교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바그다드인 에데사와 티그리스 동부지역인 아르벨에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를 양성하는 학교가 있었다. 에데사는 네스토리안 선교 본부가 있었고 3세기 시리아 네스토리안의 근거지였다. 3년 과정으로 시편과 신약 등의 교재를 통해 '땅끝까지 복음선교'에 대한 사명감과 핍박과 죽음 앞에서도 인내와 사랑으로 감수하는 훈련에 목적을 두었고, 학교를 건립하는 방법도 가르쳤다. 이 학교는 크리스챤 훈련과 자녀들의 학교로 운영되었다고 한다.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는 수도승과 목회자 선교사와 함께 카라반을 형성하였는데 팀선교라는 전략을 수립했다고 본다. 여행길에 안전을 도모하려는 목적 이외에 복음을 파는 선교사로서 팀의 시너지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 당 빵 한 조각과 물 한통으로 살아갔던 이들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는 여행에 필요한 재정을 최소화하려는 의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의 금욕적 삶은 최소한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무역을 통하여 얻은 대부분의 이윤을 선교에 사용하겠다는 취지였다.
네스토리안 상인 선교사에게서 오늘날 선교학에서 대두되는 '평신도 선교사' '텐트메이커' '비지네스 에즈 미션' '10/40 창' 등 중요한 개념들이 실천되고 있었다. 네스토리안 상인선교사는 대부분 평신도였으니 오늘날 일컫는 '평신도 선교사'의 실체를 네스토리안 선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네스토리안 상인 선교사들이 선교비를 따로 후원받지 않고 선교비를 스스로 해결했던 점에서 텐트 메이커였다. 철저하게 이윤을 남겨 선교비를 충당했으므로 오늘날 선교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는 비지네스 에즈 미션 (Business as Mission)을 실천했다고 보여진다. 네스토리안 선교 지역은 오늘날 미전도 종족으로 나누고 있는 10/40 윈도우에 있는 종족들이었다.
오늘날 중국에서 대두되고 있는 '빽 투 제루살렘 운동'은 실크로드를 가스펠 로드로 만든다는 캐치 플레이어를 내걸고 있다. 실크로드 선교는 21세기에 다시 한번 시도될 것이다.
글ㅣ시드선교회 연구실장 손상웅 목사(풀러신학교 선교역사 전공·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