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학생과 목회자들에게 설교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눈만 뜨면 설교와 관련된 생각을 하고 글을 읽고 쓰곤 한다. 설교자들로부터 자주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설교할 본문은 정해졌는데 그에 적절한 예화 찾는 것이 어렵다'는 얘기다. 나도 담임 목회를 해보았기에 그들의 고충을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책을 한 권씩 떼나가는 ‘책별 연속 설교’보다는 ‘매주일 본문이 달라지는 설교’를 구상함이 우선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2] 로마서면 로마서, 요한복음이면 요한복음, 한 권씩 정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로 설교해야 강해설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조언이 될 것이다. 성경을 한 권씩 정해서 1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순서대로 설교를 해야 강해설교라 착각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
강해설교는 책을 한 권씩 설교해가야만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럼 '강해설교'는 무엇일까?
[3] '강해설교'는 매주 어떤 본문을 정하든, 정해진 본문의 ‘핵심 메시지’와 ‘삶의 적용’, 이 두 가지 내용이 반드시 포함되는 것을 말한다. 강해설교는 책을 연속적으로 설교해나가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강해설교는 설교의 ‘철학’과 ‘원칙’을 말할 뿐이다. 매주일 설교의 본문이 바뀌어도 정해진 본문의 핵심 메시지와 적용이 있으면 그게 강해설교이다. 물론 로이드 존스처럼 로마서나 다른 성경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설교해나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4] 하지만 로마서처럼 너무 긴 내용을 본문으로 해서 1~2년간 설교하면 교인들이 지쳐버릴 가능성이 매우 많다. 그래서 로마서 16장까지 다 설교하기 전에 교인들에게 따분함과 지겨움을 가져다 줘서 강단에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
때문에 금요철야 예배 시는 요나서처럼 짧은 성경부터 정해서 책별연속 설교를 하고, 주일 대예배 때는 주일마다 본문이 달라지는 설교를 구상함이 지혜라 생각한다.
[5] 매주일 청중들에게 “또 로마서냐?” “또 율법이냐?” “또 바울이냐?”는 불평을 선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일마다 본문이 달라지는 설교에는 장점이 많다. 첫째, 청중들에게 ‘Freshness’(신선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나오는데 매주일 로마서의 내용만 가지고 바울과 율법에 대한 얘기들을 해대면 지겨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주일마다 본문이 달라지면 청중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할 수 있다.
[6] 둘째, 설교 준비하기가 쉬운 장점이 있다. 성경을 순서대로 준비하다 보면 그 본문에 맞는 예화 찾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한 주 동안 설교자가 발견한 예화에 맞는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예화 궁핍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다. 일주일 동안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혹은 어떤 사건을 목격하다가 발견하고 깨달은 기막힌 예화가 있으면, 그 예화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본문과 연결시켜본다.
[7] 자신이 정해놓은 본문에 맞는 예화를 찾는 일과 자신이 발견한 예화에 적합한 본문을 성경 66권 가운데 찾는 일 중 어느 것이 더 수월할까? 당연히 후자 쪽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필히 나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성경 본문에 예화를 맞추어야지 예화에 본문을 맞추면 강해설교라 할 수 있느냐?”라는 물음이다. 그러면 되물어보자. “본문에 맞는 예화를 사용해서 설교하는 거나 예화에 딱 맞아 떨어지는 본문을 찾아서 설교하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나?”
[8] 아무 차이가 없다. 순서의 차이일 뿐이다. 어느 쪽이 설교하기 쉬운가를 따졌을 때 본문을 정해놓고 그에 맞는 예화를 찾아서 설교하는 것보다는 내가 발견한 예화에 적절한 본문을 찾아서 매주일 설교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설교함에 있어서 편리하다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실례를 하나 소개할까한다. 페북에 글을 하나 올렸다.
[9] <목사 아버지보다 나은 아들의 영혼 사랑>이라는 타이틀로 쓴 감동적인 예화이다. 그 글을 쓰면서 나는 기도했다. “하나님, 이 예화를 사용하기에 적절한 본문이 떠오르게 해주세요!” 그리고 오늘 새벽에 일어나 성경 한 본문을 읽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본문은 여호수아서 2장이었다. 기생 라합에 관한 얘기였다. 그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순간 그저제 페북에 올린 예화를 사용하기에 아주 적절한 본문임을 알게 됐다.
[10] 목사인 아버지와 늘 거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던 아들이 어느 오는 어느 날 전도하러 가자고 아버지를 조른다. 아버지는 비가 와서 거리에 사람도 다니지 않을 거니까 오늘은 가지 말자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에게 전도지를 받아서 비가 오는 길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눈다. 가끔씩 다니는 이들에게 전도지를 나눈 후 딱 한 장의 전도지만 남았을 때였다. 그의 눈에 한 집이 들어오게 된다.
[11] 그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계속해서 벨을 누르면서 문을 두드린다. 그래도 응답이 없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벨을 누르면서 문을 두드린다. 그래도 문이 열리지 않자 소년은 포기하고 돌아선다. 바로 그때 문이 열리고 한 여인이 나와서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그때 소년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하나님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지를 주곤 집에 돌아왔다.
[12] 다음 주일 아침, 다른 주일과는 달리 소년의 아버지가 혹시 간증하고 싶은 사람은 앞으로 나와서 하라고 말한다. 그때 낯선 한 여인이 나와서 간증을 했다. 남편이 먼저 죽고 외롭고 상심한 나머지 자살하려고 지붕 서까래와 의자에 밧줄을 매고 자기 목에도 밧줄을 맨 후 의자에 올라가 뛰어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바람에 시끄러운 나머지 목에 맨 밧줄을 풀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고 했다.
[13] 밖에 나가보니 미소를 머금은 천사 같은 소년 하나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전도지를 손에 쥐어주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 전도지를 읽고 자살을 포기하고 신앙을 가지기로 작정하고 소년이 사라진 방향에 위치한 그 교회에 나왔다고 고백했다. 그녀의 간증에 모든 성도들이 울고 아버지 목사는 강단에서 내려와 아들을 품에 안고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고 하는 감동적인 예화였다.
[14] 라합의 얘기를 읽어 내려가는 도중, 성령께서 그 본문으로 설교할 때에 이 여인의 예화를 활용하면 좋겠다는 깨우침을 주셨다. 이 두 이야기는 인간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일하지만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감케 한다. 목사인 아버지도 비가 오니까 전도를 잠시 멈추자 하지만 전도의 열정으로 충만한 아들의 열심으로 인해, 자살을 시도하던 한 여인의 소중한 생명이 구원을 받게 된다.
[15] 하지만 그 소년으로 하여금 비오는 날에도 전도할 마음을 주셔서, 하필이면 남은 전도지 한 장을 나눠줄 대상으로 한 집을 주목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놓쳐선 안 될 것이다.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의 얘기도 마찬가지다. 비록 라합이 손가락질 받는 이방의 추한 여인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그들에게 ‘자비’(khesed)를 베풀어주고 자신과 가족들도 ‘자비’를 얻어 구원받는다.
[16] 수많은 여리고 성의 주민들이 당시 여호와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가에 대해 들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지식을 회심과 개종으로 결단하고 헌신한 이는 라합 한 사람 뿐이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라합이란 한 이방 여인의 두드러진 신앙도 칭찬할 만 하지만, 알고 보면 이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임을 놓쳐선 안 된다. 그렇다.
[17]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역사하심 100%’와 ‘인간의 최선 100%’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결과물들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또 어떤 선한 일을 행하실까?’를 늘 생각하며, 그분이 주시는 힘을 따라 매순간 최선을 다해 복음전도에 힘쓰는 것임을 믿는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주여, 나를 복음의 도구로 써주소서!”
아멘!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신성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