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과 “신앙인”의 본질적인 차이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에 대한 확신에 있다. 이 확신이 없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종교인”이고, 이 확신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앙인”이다. 이 확신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는 사람은 “종교인”이고, 이 확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려는 사람은 “신앙인”이다. 그리고 오직 “신앙인”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인의 종교 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확신하는 가운데 올려 드리는 기도와 예배, 순종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신앙인의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막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병 환자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 때 거기 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이 화를 내면서 “어째서 이 값비싼 향유를 낭비하는가?”라고 소리를 치면서 이 여인을 책망했다. 참고로 이 사람은 예수님을 은 30냥에 팔아먹은 가룟 유다였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화를 내며 책망한 이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에게는 너무나 큰 감동을 주는 행동이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막14:6)
여러분 사랑이 없으니까 돈 계산 하지 사랑이 있어봐요. 돈 계산하나. 예수님은 이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이 사건 속에서 “돈 문제”를 보고 계신 것이 아니다. “사랑의 문제”를 보고 계신 것이다. 여러분, 돈 문제는 사랑 문제에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눅7장에 보면, 예수님 들어오실 때 발 씻을 물도 제공하지 않았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기 위해 자신의 옥합을 깨뜨린 여인을 더러운 죄인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세요. (눅7:36-50) 사랑의 문제다.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의 행위를 돈 낭비라고 책망했던 가룟 유다나, 옥합을 깨뜨린 이 여인은 불결한 죄인이며, 이 불결한 죄인이 예수님의 발을 씻도록 내버려 두고 있는 예수님 역시 율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가르쳐 주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이 중 누구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 가운데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던 사람은 딱 한 사람, 자신의 향유 옥합을 깨뜨려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드렸던 이 불결하고 경제 관념 없는 여인, 이 여인 한 사람 뿐이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막14:9)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하는 것이 왜 그렇게 힘들까? 사랑의 문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갈망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나타나는 증상.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는다. “뭐 먹고 싶어? 뭐 갖고 싶어? 뭐 하고 싶어?” 사랑하니까 그 사람의 뜻을 갈망하는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니까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도 부족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은 짜증나는 종교적인 의무와 책임만 가득한 종교 생활이 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사랑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게 된 이유가 있다. 마귀는 그 선악과가 얼마나 맛있고 좋은 것인지를 가르쳐 주면서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유혹하지 않았다. 마귀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선의를 의심하게 유도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을 품는 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순간 나를 위한 최선의 길은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하는 것이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미래의 소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다. 너희에게 미래의 소망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절망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너를 위한 계획은 너가 짜라. 너희가 너희 삶의 하나님이 되어라. 네 삶의 주인은 너다.” (코나:삶의 주도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의심하지 말라. 우리가 왜 염려하고 두려워하는지 아는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1 요 4:18)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때만,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내 안의 모든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다.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는 힘은 재물의 힘도 아니요, 지위의 힘도 아니라, 바로 사랑의 힘이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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