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아가는 두루마리, 여러 빛깔의 말들, 더러운 옷을 입은 제사장, 바구니를 들고 있는 날개 달린 여인, 벌 받은 목자들, 흩어진 양떼 등은 스가랴서 말씀의 그림들입니다. 인상 깊은 그림 하나가 천 마디 말과 같듯이 스가랴 말씀의 예언은 분명 놀라운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찬양에 미술과 예술이 합쳐진다면 예배는 새로운 역동성과 생생한 감동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술은 말을 뛰어넘어 우리의 신앙을 해석하고 표현함으로써 예배자들을 하나님의 임재로 이끌도록 돕습니다. 스가랴가 사용한 생생한 그림들은 예술적 표현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의 가장 강력한 그림 중 하나는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에 의해,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 차용되기도 했습니다.
예배에서의 예술적 요소, 음악, 말씀의 해석적 이해, 몸의 움직임, 시각 예술, 건축 등은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순수한 헌신의 마음과 합쳐졌을 때 효과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잘 전달할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5)
스가랴는 유다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회복의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이전의 선지자들은 대체로 불순종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주로 강조했으나 스가랴는 달랐습니다. 심판은 이미 일어났으며, 이제 백성들은 성전 예배를 회복하고 언약의 공동체를 새로 세워야 했습니다. 스가랴는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것들을 전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 공동체를 격려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슥 2:10).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 중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완수하도록 스가랴 선지자를 사용하셨습니다(슥 6:14).
스가랴 말씀이 연극이라면 무대는 단순히 예루살렘뿐 아니라 세계 전체이며, 단순히 성전 건축이 아니라 넓고 먼 우주의 미래 이야기입니다. 스가랴서는 묵시이기에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닙니다. 환상적인 미래와 거대한 계획, 신비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묵시의 말씀은 모든 것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주의 드라마를 쓰시는 분이며 역사의 권위 있는 감독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과 겸손한 순종함으로 그리고 지금 있는 것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의 다스림을 확신하며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스가랴는 묵시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택한 백성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사람들로부터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선포합니다(슥 2:10-11)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공격해 그가 성전을 회복하는 임무에 적합하지 않게 만들었지만, 스가랴는 여호수아와 총독이자 다윗왕의 후손인 스룹바벨을 격려했습니다. 그들은 커다란 장애물을 넘어 승리할 것이며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이후 예루살렘은 다시 거룩한 산이라고 불릴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 중 남은 자들은 평화와 번영 속에 거할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금식하며 슬퍼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기쁨의 잔치로 바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8).
스가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을 위해 지도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이 땅의 지도자들 역시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여호수아와 스룹바벨처럼 용기를 잃기도 합니다. 스가랴는 ‘쓸모없는 목자들’같이 권위를 잘못 사용하고 그들의 양떼를 방치한 지도자들을 꾸짖었습니다(슥 11장). 그들은 하나님께 받았다고 주장하며 거짓된 말씀을 전했지만, 스가랴는 새로운 지도자, 공의와 겸손으로 다스릴 왕이 오고 있다고 선포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그리고 은혜와 기도의 영이 부어져서 하나님께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비록 이 소망의 예언들이 당시에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스가랴의 새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모든 무릎이 그리스도 앞에 꿇고 모든 입술이 그를 주시라 고백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스가랴의 예언이 부분적으로 성취된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0-11) 이 말씀은 소망 가운데 우리의 예배를 살아있게 만듭니다. 스가랴는 이 소망의 말씀이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약속된 ‘싹’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너와 네 앞에 앉은 네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슥 3:8) 그리고 모퉁잇돌이자 말뚝이십니다. “모퉁잇돌이 그에게서, 말뚝이 그에게서, 싸우는 활이 그에게서, 권세 잡은 자가 다 일제히 그에게서 나와서”(슥 10:4)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친숙한 말씀으로 스가랴는 예언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스가랴 이후 5세기가 지나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거리에 모여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겸손한 메시아 왕을 환영했습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 21:4-5)
우리는 예수님께서 로마라는 이 땅의 권세를 멸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죽음의 영적 권세를 깨뜨리시기 위해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예배 중에 기쁨으로 찬양하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며 완전히 우리 가운데 거하실 그때를 간절히 기다립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이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미래의 승리를 고대하는 참된 예배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면서 기대가 높았습니다. 그러나 포로 이후의 삶은 그들이 원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시아에 지배받는 삶은 다윗의 자손이 다스리는 왕국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많이 달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은 좌절했으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 의문을 가졌습니다(말 2:17).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신실함을 가지고 새롭게 예배하도록 ‘나의 사자(my Messenger)’란 뜻인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말 1:1-2)과 위대함(말 1:5, 11), 두려움(말 1:14), 경외로움(말 2:5), 정의(말 3:1-5), 미래에 대한 주권(말 3:1-2, 4:1-2)의 말씀으로 일깨우셨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게으르고 겉치례와 형식주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흠이 있는 제물을 드렸으며 불완전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말 1: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값싼 제물을 드리는 이들을 비난하시고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 3:8-9)
우리는 갈수록 영적으로 무감각해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매우 강하고 특별하지 않는 한 반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관심은 우리의 예배에도 스며들어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 형식적인 예배가 되곤 합니다. 이것이 말라기의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만연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백성들과 지도자들의 예배는 형식적이었으며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섯 편의 말씀을 통해 그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 말씀들은 말라기 선지자의 선포와 듣는 이들의 거부 그리고 말라기 선지자의 반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말라기 말씀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무관심해지거나 형식적일 때 우리의 영적 생활을 새롭게 하고 예배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점점 영적으로 갈급해지는 이 시대에 말라기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배가 공허하고 아무 감동이 없는데 하나님께 계속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누구나 영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실망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우리는 말라기의 백성들이 빠진 곤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신실한 예배를 통해 새롭게 하도록 말라기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말 1:1-2)과 위대함(말 1:5, 11), 두려움(말 1:14), 경외로움(말 2:5), 정의(말 3:1-5), 미래에 대한 주권(말 3:1-2, 4:1-2)을 일깨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위해 값싼 제물을 드리는 이들을 꾸짖으시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행위를 그만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말 3:8-9).
말라기서는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를 새롭게 하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말 1:11)
우리는 단순히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경외로우시고 위엄 있으시며 한없는 높임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에 예배합니다(말 1:5-8). 우리가 낙심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가질 때, 우리는 내 생각과 감정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본성에 집중해야 합니다.
말라기는 유대인의 역사와 한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예언적 약속을 완전히 성취하실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타나실 때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말 3:3)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공의로운 제물인 이 땅 위에서의 연단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들을 완전히 회복하신 후에 우리는 진실과 순전함으로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약속을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언합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2)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언약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릴 날까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것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 없습니다(말 3:17).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의 예배를 통해 기쁘게 춤을 추며 벅찬 감동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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