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3. 다양한 부르심
그렇다고 당신만 하나님이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여 하나씩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한 분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나라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그들을 모델로 삼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백성인가를 우리에게 미리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레 26:12)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선언이자 개인적으로는 초청장을 발급하는 일과 같다 하겠습니다. 이어 믿음을 선물하고 천국행 열차에 올라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식과 모양들은 매우 다양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창 12:1~2), 모세처럼 한 민족의 최고 지도자로 부르시고(출 3:4), 다윗 같은 이는 왕으로 부르시고(삼상 15:17), 브살렐 같은 이는 장인 즉 전문기술자로 부르시고(출 31;1~6), 어떤 이는 사사로, 선지자로, 성전을 섬기는 레위인으로, 사도로, 교사로, 장로로, 집사로 부르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부르심이 가리키는 하나의 목표지점은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이렇게 영원 전에 비밀리에 택하여 두신 당신의 자녀들을 때에 맞추어 부르시어 위대한 구원 사역에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과 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구원 사역에 동참하는 것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영원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한 개체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시사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받은 이후부터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위치에서 충실한 삶을 살면서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이 바라시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지상에 다양한 교회들을 세우시고 이들을 통해 한 걸음씩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계십니다.
4. 부르심에 대한 두 가지 반응
그런데 앞의 음식점 사장님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다 듣고 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귀에 들리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모든 사람의 귀에 들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외적 소명’(external calling)이라 하고, 외적 소명을 받은 사람 중에서 특별히 믿음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내적 소명’(internal calling)이라 부릅니다.
‘외적 소명’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중에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나는 복음을 듣지 못했어요”라고 변명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는 효과를 거둡니다. 복음은 시간과 민족과 계급을 초월하여 모든 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아마 한국인치고 교회의 십자가를 보지 못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은 복음에 있어서 변명치 못합니다. 자신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외적 소명에 관심을 가지고 한 번이라고 교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살펴보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렇다면 복음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훌륭한 분들은 아예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이것은 너무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하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다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가능한 판단입니다. 누구를 구원시키거나 시키지 않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일입니다. 하나님만이 결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어 구원을 시키는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리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뜻이자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열 명의 사형수를 다 사면시킬 수도 있으시고, 그중 단 한 명만 사면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결정은 가장 완전한 결정이며 가장 영광스러운 판단이시며 가장 인간에게 유익한 선택의 결과입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두고 어떤 인간이 감히 하자가 있고 불공평하다고 반문한다는 말입니까? 만약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인간들이 어떤 돼지는 도축하여 고기로 먹고 어떤 돼지는 생명을 다할 때까지 살려둔 것을 두고 돼지들이 불평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의 논리는 명쾌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 9:20~21)
다음으로 ‘내적 소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죄인의 마음속에 복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며,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향하도록 감화케 하며, 구원에 이르도록 효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소명은 죄인의 마음을 움직여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는 뜻에서 ‘유효적 소명’(effective calling)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에도 누구는 외면하지만 성령의 내적 소명을 받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돌이켜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즉, 갑자기 하나님 말씀이 귀에 들리고 믿어지고 마음에 감동이 생기고 자신의 추악한 죄들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가를 깨닫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 이 놀라운 부르심으로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 부르심으로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세상에서 구별되어지면서 동시에 세상 나라 소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르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둘째, 이 부르심은 영원토록 취소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셋째, 이 부르심으로 모든 신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사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넷째, 이 부르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2:12)
5. 결어
그러나 안타깝게도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일마저 다 알고 예정하셨습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롬 9:27)(사 10:22)
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택함을 입어 부르심을 받고 지금 이 교회당에 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 자체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감격해야 합니다.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 내게 일어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진심으로, 열렬하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럼에도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사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이름표를 가졌다는 것은 누구 앞에서도 그 신분을 당당하게 내보인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름표는 공적인 신분에 대한 의무감이 함께 부여됩니다. 사관학교 생도들은 여타 일반 대학생들과는 다르게 가슴에 명찰을 부착하고 다닙니다. 그것은 ‘나는 사관학교 생도’임을 공표하면서 동시에 생도에 맞는 언행심사를 가져야 하다는 책무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예전보다 조금 더 불량(?)해 진 것은 옛날처럼 교복에 이름표를 달고 다니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나쁜 행동을 할 때 모든 인간은 자기 이름을 숨깁니다. 인터넷상에 댓글을 달 때 실명으로 댓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이제 이름값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각자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모두의 이름인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이름의 영예를 드높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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