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북의 “남한 불바다” 협박, 공갈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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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어떤 경우에도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했다. 그러나 정부는 북한의 핵 무력 정책을 비판하는 동시에 완전한 비핵화를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 김정은은 지난 8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7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절대로 우리가 먼저 핵 포기, 비핵화를 하는 일은 없으며 그를 위한 그 어떤 협상도, 그 공정에서 서로 맞바꿀 흥정물도 없다”고 선언했다. 핵 무력 정책을 법령으로 채택한 것을 직접 언급하며 한 말이다.

북한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핵 무력 정책 및 법령은 핵무기를 어떤 경우에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법으로 규정했다는 게 핵심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이 핵무기 사용 명령 권한을 김정은만 갖도록 지휘·통제권한을 일원화하고 김 체제가 공격을 받는 유사시엔 자동으로 핵 타격을 가한다는 조항이다. 이를테면 한·미군이 김정은 제거 작전에 들어가면 바로 핵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일종의 위협이다.

북한이 이번에 핵 무력 정책을 법으로 못 박은 것은 지난 2016년 7차 당 대회 때 김정은이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걸 180도 뒤집은 것이다. 그동안의 핵이 ‘억지 수단으로서의 핵’이라는 통상적인 개념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보다 공세적인 핵사용으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법령에 ‘자동 핵 타격’ 외에 핵무기 사용 조건으로 5가지 경우를 적시했다. 핵이나 기타 대량살상무기(WMD)에 의한 대북 공격, 지도부에 대한 적대세력의 핵 또는 비핵 공격, 주요 전략 대상에 대한 치명적 군사적 공격 등이다. 그런데 주의 깊게 볼 부분은 이런 공격이 감행됐거나 임박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자동으로 핵 타격을 가하도록 한 대목이다.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의 핵 무력 정책 법제화와 관련해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확고하다”며 “북한의 핵 위협을 억제하고, 핵 개발은 단념시키며, 대화와 외교를 통해 비핵화를 추진한다는 총체적인 접근을 흔들림 없이 취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다소 원론적인 입장인 반면에 여당은 비판의 공세를 높였다. 국민의힘은 수석대변인 논평에서 “북한의 핵 보유 의사를 넘은 핵무력 법제화는 그동안의 도발과는 또 다른 양상이고 국가안보와 국민생명에 직결되는 위협이기에 매우 유감스럽다”며 “국민의힘과 윤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대화의 문은 늘 열어두지만, 무력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국제사회도 즉각 우려를 나타냈다. 유엔은 9일 정례 브리핑에서 “븍한의 핵 무력 정책 법령화는 핵 위험을 줄이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 반하는 일”이라며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에 관한 대화 재개를 촉구한다”고 했다. 미국도 외교를 통해 비핵화를 달성한다는 바이든 정부의 기조에는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북한이 핵무기 불포기 선언을 한 날 권영세 통일부 장관은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인도적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 남북 당국자 회담을 열자고 전격 제안했다. 통일부의 남북 이산가적 상봉을 위한 당국자회담 제안은 추석을 앞둔 시점에서 북에 고향을 둔 실향민에게 한 가닥 희망을 주고, 북한의 대남 적대 정책에 대해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동시에 담긴 것으로 보인다.

사실 남북한 사이에 이산가족 문제만큼 시급하고 중요한 현안도 없다. 6.25 전쟁 이후 남북 분단이 만든 비극이 7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남북한밖에 없다. 더구나 이산가족 상봉을 기다리는 이들 모두 80~90대 고령이어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윤 대통령 취임 이후 더욱 노골적으로 대남 적대 자세를 취하고 있는 북한이 우리의 인도주의적 제안에 호응해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거의 희박하다. 코로나19 백신을 지원하겠다는 제안에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윤 대통령의 대북 지원을 위한 8.15 ‘담대한 구상’에도 온갖 비난을 퍼부으며 거부한 북한이다.

북한이 핵을 움켜쥐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김일성의 유훈인 대남적화 통일 획책에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들 체제가 외세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절대로 우리가 먼저 핵 포기, 비핵화를 하는 일은 없다”는 김정은의 말도 겉으론 절대로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외침이지만 그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체제 보장 등 자기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비핵화 협상에 응할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담겨있다.

북한의 핵 위협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다만 전에는 “남한을 불바다를 만들겠다”는 말이 거친 공갈협박에 가까웠다면 이젠 눈앞에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보다 철저한 대비책을 세워 대응해야 할 줄 안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체제 전복이 목적이 아닌 한민족 전체의 평화 공존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따라서 상대방이 우리의 선의를 왜곡해 호응해 오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두드려 한다.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법제화한 이상 핵을 포기하게 할 방법이 점점 더 멀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의 장에 북한을 끌어들이는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