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출생지는 남 유다의 베들레헴이지만 성장한 곳은 북이스라엘 갈릴리 지방에 속한 나사렛 촌이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는 북쪽 지방 나사렛 출신이고 부친 요셉은 베들레헴이 출생지였다. 남남북녀의 부부였다.
예수님 당시에는 남과 북간에 지역적 종교의 대표성이 달랐다. 이는 남과 북의 분립으로 인한 것이었다. 신구약에서 북 지역에서는 그림심산이 남지역에서는 시온산(예루살렘)이 그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신구약에 걸쳐 소개되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북 지역의 그리심산(사마리아 지역)에서 축복을 하고 마주 보는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하라고 지시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 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신 11:20)
여호수아는 이 명령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단을 쌓고 모세의 율법을 돌에 기록한 후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각각 축복과 저주의 율법을 선포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누릴 축복과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가 당할 저주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훗날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할 때에 혈통적으로 선민의 순수성을 잃은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의 경전인 '사마리아 오경'에 따라 이곳 그리심산에 성전을 세우고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산도 그리심산이라고 자의적으로 왜곡 해석과 주장을 하였다. 또 여호수아가 세운 '여호수아의 성소' 역시 그리심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런 전통에 따라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 있는 자신들의 성전에서 매년 절기를 지켰다. 예수님을 사마리아 수가라성의 우물가에서 만났던 그 여인도 자신들의 예배처가 그리심산 임을 말했었다. 그곳의 주민들은 그런 역사적 배경을 믿고 있었기에 그곳을 거룩한 산으로 신성시하며 우상시하였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을 의식하면서 경쟁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장차 그리심산에 오실 것이라 믿고 있었고, 거기에 반해 남유다 지역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오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또한 남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인들은 혼혈족이고 우상을 섬기는 잡족이라고 여기면서 경멸하였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700여 년의 역사를 이어왔기에 남과 북의 이스라엘인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신앙적으로나 민족적으로도 갈등과 멸시와 차별의 관계가 지속되어 왔었다. 이스라엘 땅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지배를 700여 년 동안 받으며 이들 강대국들에 의해 외형적으로는 하나된 민족이 되었으나, 그런 역사 속에서 이질화된 신앙적 배경으로 북이스라엘인과 남유다인들 간에는 민족 정서가 치유되지 못한 채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그런 장구한 세월의 흐름 중에 마지막 통치국인 로마제국의 식민지 시대에 인류의 메시아이신 예수그리스도가 등장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지는 유다지역 베들레헴이지만, 30여 년을 북이스라엘의 갈릴리 지방에서 거주하시며 공생애를 준비하셨다. 즉 남과 북의 연고성을 같이 갖고 계시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이 아닌 북 이스라엘의 갈릴리에서 공생애의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갈릴리 공생애의 첫 시작의 사역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700여 년 전에 예언되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2~17)
예수님의 갈릴리에서 사역이 시작된 것은 그 지역 주민들이 오랫동안 멸시와 천대와 소외당한 역사가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천국의 갈망이 더하였고 위로와 치유가 더욱 필요하였었다. 그곳은 사회 계층적으로 볼 때 가장 낮은 자들이었다. 메시아 예수님으로서는 유다 예루살렘보다는 북지방인 갈릴리의 사역이 더욱 우선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오랫동안 반목과 갈등으로 지내온 남과 북을 하나로 묶으시며 회복하시려는 깊으신 의도와 긍휼하심을 베푸시고자 하신 선하신 의도이셨다.
예수님께서는 북쪽 갈릴리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주민들 간에 가장 갈등의 골이 깊은 곳인 북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사마리아를 집중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들과는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저들을 경멸하며 멀리했었다. 남 유다 주민들은 북쪽 갈릴리로 가는 데에 가까운 사마리아로 통과하지 않고 몇칠 더 걸리더라도 사마리아를 우회하여 갔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특히 유대인 남자들이 가장 꺼리는 그 사마리아를 정면으로 통과하시면서 그곳 주민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해 그 성으로 들어가셨다. 그곳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그녀를 회심시키고 이어서 그 마을 사람들을 찾아가 몇 날을 유하시면서 주님을 영접케 하셨다. 이러한 의도는 영적인 구원사 측면과 지역적 갈등과 역사적으로 분단된 사마리아를 회복하시며 화합케 하신 위대한 통합과 화해를 위한 행적이셨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역 간의 갈등과 종교적인 차별을 해결하신 위대한 리더쉽을 몸소 보여주셨다.
장차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의 지역 갈등이 심화될 수도 있다. 그 사례가 독일에서도 있었다. 통일이 되자 서독인들은 공산사회에 익숙해진 동독인들을 게으른 시민이라고 폄하하였고 동독 주민들 중에는 통일되기 전에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평범한 시민이 되자 사회적 신분의 상실감에 고통스러워했다. 이러한 지역적, 사회적 갈등은 경제적 보상으로도 안 되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능력으로 화해와 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통일된 후에는 이북 지역에서 교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게 될 것이다.
강석진 목사(「근현대사로 읽는 북한교회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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