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시(시장 최원철)는 최근 충남 최초 근대학교인 공주 영명학교를 설립해 근대·민족 교육을 장려하는 등 교육으로 공주의 근대를 연 선교사 우리암 선생을 8월의 역사 인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우리암 선교사는 1883년(고종 20)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태어난 우리암 선생의 본명은 프랭크 윌리엄스로 1906년 공주로 선교를 오게 되면서 공주와 인연을 맺게 됐다.
공주에 온 뒤 운영이 중단된 명설학교를 ‘중흥(中興)학교’로 재정비해 개교했으며, 1909년(광무 13)에는 대한제국 학부대신으로부터 ‘영명학교’라는 교명으로 정식 설립인가를 받게 되면서 학교 이름을 영명(永明, 영원한 광명)이라고 지었다.
이후 영명학교는 충남 최초의 근대학교로서 사애리시 여사의 영명여학교와 함께 충남 지역의 학생들에게 근대·민족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공주 지역 3·1독립운동 때 영명학교의 교사와 많은 학생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0년 이후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의해 우리암 선생은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됐으며 영명학교도 1942년을 마지막으로 폐교됐다. 일제에 의해 추방된 이후에도 우리암 선생은 인도로 가서 영국군과 함께 연합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한국광복군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영국군과 함께 대일 항전을 전개하는 등 통역관으로서 큰 활약을 펼쳤다.
1945년 광복 후 우리나라로 돌아온 우리암 선생은 한국에서의 경험을 인정받아 미군정청 하지 중장의 농업담당 고문으로 활동하였는데 이 기간 우리나라의 교육과 농업 발전 및 정부 수립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또 1946년 3월에는 영명학교 동문들과 영명학교 복교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1949년 12월 영명학교는 영명상업중학교로 재개교하게 됐다.
1953년 11월 은퇴한 선생은 1962년 6월 미국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한편, 충남 공주시는 최근 3명의 선교사 사애리시, 우광복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3.1운동과 한국광복군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고증자료 미비로 독립유공자 추서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에 공주시는 지난 4월부터 공주선교사 독립유공자 추서를 위한 자료조사 용역을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에 위탁했으며, 연구소는 국내는 물론 일본과 인도, 미국 등지에서 독립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고증자료를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에 서훈을 신청했으며, 심사 일정에 따라 이르면 2023년 서훈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