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기나긴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은 것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이다. 8.15는 동아시아 현대사의 기점이다.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 시달린 여러 민족들에게는 해방과 독립을 가져다준 경축일이다.
현재 우리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성을 지닌 정부요, 이승만과 한경직 등 건국의 주역들이 현명한 선택의 결과로, 공산화를 막고 지금의 자유 대한민국을 만들어 왔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지도자들로 수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건국을 고민하고 민족의 길을 열은 두 사람들 주목하게 된다. 특히 주류로서 한경직 목사와 비주류의 조용기 목사를 대표적으로 목회자로 들 수 있다.
이승만과 한경직의 ‘기독교적 건국론’
이승만은 불과 23세 젊은 나이에 감옥생활을 하게 되면서 옥중에서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믿는 날부터 옥중 동료들에게 열심히 전도하여 40여 명을 기독교에 입신케 하였다. 그리고는 옥중 학교를 열어 함께 공부하였다. 그는 그에게 감동을 받은 교도관들의 도움으로 많은 책들을 구하여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논설을 써서 감옥 밖으로 보낼 수 있었다. 그가 옥중에서 쓴 글들의 주제를 이정식 교수는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기독교로 나라 세우기’라 평하였다. ‘기독교로 나라 세우기’는 다른 말로 ‘기독교 건국론’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은 당시의 조선 상황을 논에 물이 마르고 뜨거워 고기가 살 수 없는 상황이어서 물고기가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을 찾아가야 하며, 새 물줄기는 바로 기독교라 하였다.
“사람의 극히 어려운 지경은 곧 하나님의 감화시킬 기회라 하나니 비교하건대 논고에 물이 마르고 뜨거워 고기가 살 수 없게 된 후에야 스스로 새 물길을 얻어 강과 바다를 찾아갈지라....이 세상은 우리의 잠시 사는 논고물이라. 다소 태평안락하게 사는 사람들도 바다같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 생수를 찾기에 게으르지 않컨대, 하물며 이 물이 마르고 흙탕 되는 도탄 중에 들어 어찌 새 물줄기를 찾지 아니하리오.... 대한 사람의 새물줄기는 예수교회라.... 정치는 항상 교회 본의로서 딸려나는 고로 교회에서 감화된 사람이 많이 생길수록 정치의 근본이 스스로 바로 잡히나니, 이러므로 교화로써 나라를 변혁(變革)하는 것이 제일 순편하고 순리된 바로다.... 썩은 백성 위에 맑은 정부가 어찌 일을 할 수 있으리오. 반드시 백성을 감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 후에야 정부가 스스로 맑아질지니 이 어찌 교회가 정부의 근원이 아니리요.”
이런 이승만 대통령과 한경직 목사의 건국에 대한 같은 생각과 공감대는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1945년 12월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모여 창립예배를 드린 베다니 전도교회의 한 목사가 해방 후 3년간 건국을 위해 주창했던 내용을 1949년 서울 보린원에서 출간하였다.
저서 「건국과 기독교」는 초기 대한민국의 정신적 기초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며 때로 정치와 종교의 분리에 대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일제에서 해방된 한반도에 어떤 형태의 국가가 세워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열정적 설교로 방향을 제시하였고, 그를 따르는 이들은‘정치참여’로 그의 주장에 동조하며 공산화를 막고 자유 민주주의 나라를 세우는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한 목사는 1945년 영락교회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 미군정 시절과 이후 제1공화국에서부터 제3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계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직간접적으로 대한민국의 해방과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 목사의 「건국과 기독교」는 해방부터 건국과정에서 끊임없이 주창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토대로 한 ‘기독교 건국론’이다. 한 목사는 근·현대사를 열어가는 대한민국인 새 나라의 머릿돌은 반드시 기독교 정신 위에 건설되어야 마땅하다는 점을 분명히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개인 인격 존중사상, 개인의 자유사상, 만인 평등사상을 꼽았다. 민족적으로 망국의 절망적 비애 중에 위안을 얻고 사회적 부활의 희망을 안게 하는 유일한 현실적 원천은 바로 기독교라고 역설했다.
당시 한 목사의 ‘기독교 건국론’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옛 나라가 없어진지 이미 40년, 새 나라가 건설되려는 이 시기에 ‘이 나라의 정신적 기초를 어디에 두어야 하겠는가’라는 문제는 우리 3천 만의 중대 관심사입니다. 이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겠고, 또 필연적으로 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첫째, 이 새 나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합니다(중략). 둘째, 도덕적 국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원천은 바로 기독교뿐이라고 역설했다.
또 한 목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발전해 나온 결과가 바로 ‘정부(政府)’라는 것이다. “참으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든지 다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이 있다. 즉 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됨을(롬 13:6) 기억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권세의 출처가 근원적으로 하나님에게 유래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통치를 행하여야 한다는 점을 동시에 강조한다. “자연에는 자연법이 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도덕법이 존재하듯이 정치에도 일관된 원리가 있으니, 그 원리에 의하여 정부를 세워 모든 백성으로 복이 되게 하는 것이다. ‘공의는 나라를 흥하게 하고’라는 말씀과 같이 공의를 정치의 원리로 주신 것”이라고 밝힌다.
한 목사는 기본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서로 별도의 영역에서 분리해 존재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을 폈다. 과거 역사 속에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했을 때, 적지 않은 폐해가 속출했음을 상기시킨다. 그렇다 해서 기독교인의 국가를 위한 개인적 정치 참여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오히려 각계 기독인은 적극적으로 국가를 위한 정치에 참여해야 할 것을 권하였다. “전 대한 민족의 사상을 기독교 사상으로 순화한다면 공의의 나라 기독교 독립 대한이 속히 이루어질 것을 확신한다.”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전 국민이 노력하고자 할 때, 마땅히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적극 권면하고 있다.
한 목사의 ‘기독교 건국론’의 핵심은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과 그 근원으로서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해방 공간에서 새로운 나라의 틀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틀은 바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한 신의 섭리와 경륜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위해 모든 국민이 합심하여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가 가장 경계하는 건국 시나리오 중 기피대상 1호는 유물론적 공산 독재국가의 출현이었다.
한 목사는 새로운 국가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자유가 중심되는 민주국가의 건설을 목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유가 언제나 보장될 수 있는 민주주의의 기본 요소는 ‘첫째로, 민주주의 근본 사상의 철저한 이해와 신념, 둘째로 질서와 법의 존중사상, 셋째로 자유를 바로 쓸 수 있는 국민의 도덕적 품격에서 찾을 수 있다’고 적시하며 건국의 초석이 중요한 만큼, 세워진 나라가 번영을 향하여 나아가고자 할 때 개개인이 꼭 갖추어야 하는 덕목도 강조됐다. 또 분단 현실의 극복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강령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기독교 건국론’의 현실적 적용
한 목사는 현실정치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기독인이 새 나라를 건설하는 주역이 되어야 하며, 그러한 가능성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 희망이요 기대라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내 보이고 있다.
“기독교는 국가적 견지에서 보면 애국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3·1운동 당시의 기독교의 역할이 어떠하였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조국 부흥 운동에 헌신한 애국지사의 대다수가 기독교 신자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산 선생, 남강 선생을 비롯하여 지금 생존하여 지도하시는 이승만 박사, 김구 주석, 김규식 박사, 그 외에 국가를 위하여 순국한 허다한 애국지사의 수는 오직 하나님만 아실 것이다.”
한 목사는 내심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우익을 대표하는 민족진영의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을 매우 안도하였다. 더 이상 남한에서의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질서를 확립할 정부가 세워지는 일은 그의 평소 신념과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한 목사의 ‘기독교 입국론’은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이어기독교인이며 투철한 반공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으로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실제적인 꽃을 피울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런가하면, 또한 실제로 제1공화국 시절 처음 열렸던 개원 국회는 당시 감리교 목사이기도 했던 이윤영 의원의 기도로 개회됐으며, 간접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취임식도 기독교적 예전으로 집례되었다. 이승만 정부 전반기의 지배적 이데올로기였던 ‘일민주의’ 사상은 기독교적 성격을 근간으로 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 ‘기독교를 나라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확신을 거듭 표명해 왔기에, 이 점에서 어쩌면 한 목사가 상상하던 일이 현실화 된 것이다. ‘기독교 건국론’이 현실정치에서 가장 극적으로 구현된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군정기에 도입된 형목·경목·군목 제도, 성탄절 공휴일 제도 등을 그대로 유지했고, 주요 국가 의례들이 기독교식으로 제정되거나 거행되도록 하였다. 이 같은 대한민국의 설립과 이어 등장했던 정부와 국회, 그리고 사법기관 등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특히 개신교적 이념이 반영되는 현상은 다양한 방면에서 꾸준히 그 형태를 볼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땅을 합법적으로 구입해서 합법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가질 수 있게 하는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아이러니하게 양반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지주제도를 없애는 농지개혁을 단행, 토지를 소작인에게 돌려주는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하는 기반을 만들어 6.25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자기 땅을 지키는 동력이 되었다.
한 목사는 기독교의 주도적 건국 참여와 함께, 기독교의 정치·문화적 개화운동을 동시에 강조함으로써 해방 이전, 즉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던 복음 1세대가 가졌던 진보·보수의 양대 과제를 동시에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양상을 보여주며 새로운 대한민국의 출발에 기여했다. 한 목사에게 있어 민주주의라는 꽃은 반드시 기독교적 문화라는 밭에서만 아름답게 필 수 있다고 본 바, 당대의 선진 제국 곧 화란이나 미국 등이 바로 기독교 문화에서 꽃을 핀 민주주의 국가들이 예증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의 ‘기독교 건국론’에서 민족의식과 신앙의 외연화는 해방과 건국에 있어 기독교적 민족의식의 표현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남한인구 1/4에 해당하는 개신교 주류 세력에 끼친 영향을 감안한다면, 당시 한국 기독교의 민족의식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한 목사의 ‘기독교 건국론’은 진보와 보수간 균형을 이루는 수용적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기독교적 건국론’이 해방 당시에는 기독교인의 적극적 사회 대응이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보수화 경향을 띠고 기득권에 안주하게 되고, 특히 정부 수립 후 보국, 안보, 사회 안정이라는 흐름에 따라가다 새로운 비전 제시가 이어지지 못하였다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이러한 처음 행적은 시간이 갈수록 정치적 보수성으로 기울었고 특히 그의 투철한 반공사상과 사회안정 추구의 열망은 소극적 정치참여 형태로 나타났다.
한 목사의 좌절과 신앙의 외연 확대
한 목사 자신의 생애에서 평생의 과업으로 꿈꾸던 ‘기독교적 건국’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상황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을 낳게 되었으니, 그것은 첫째로 6·25전쟁의 발발이요, 둘째로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부패 스캔들로 이어진 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한 목사의 ‘기독교 건국론’이 당면한 시련은 이승만 정권의 실패와도 직결된다.
새로 건립된 국가에서 기독교 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법치, 그리고 질서에 대한 존중 등의 핵심 가치를 주장하였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우익 진영의 민주인사, 특히 기독교 인사들의 정부 요직 참여를 반겼지만, 현실에서 정치권력이 강화되는 와중에 그에 기생하는 사이비 신자들이 횡행하고 또한 그로 인해 4.19혁명으로 정권 자체가 붕괴되는 엄청난 충격적 결과를 가져온 사실에 자못 큰 실망을 금치 못하였다. 한 목사의 ‘기독교 입국론’은 미처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깊은 병으로 상처를 입고 좌절해 버린 형국이 되었다. 이는 정교분리와 목회자적 정체성에 입각하여 복음화운동에 매진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후 한 목사는 70년대에 들어서며 주요 관심은 5천만 명 영혼구원의 불길을 당긴 ‘민족복음화’와 희생과 섬김으로 이룬 ‘한국교회연합운동’, 더 나아가 민족 통일에 대한 아젠다(agenda)로 방향을 돌린다. 한 목사의 ‘민족복음화’론은 한국민족에게 복음을 전해 기독교 정신을 확산하고 진흥시켜 건실한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가고자 한 것인 동시에 교회부흥의 새 장을 열었다. 흩어져 있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으며 보수와 진보의 목소리를 내게 한 것도 그의 탁월한 리더쉽이 끼친 영향이었다.
한 목사의 삶은 대한민국의 근대사만큼이나 희노애락으로 점철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서 「기독교와 건국론」을 통하여 한 목사의 신앙, 철학, 그리고 삶의 족적은 그의 주변인들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형성과 그 전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남겨졌다는 점이다. 공산화를 막고 오늘의 자유대한민국 탄생과정에 있어서 한 목사의 ‘기독교적 건국’이라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실천적 삶이라는 발자취 앞에 그것의 실천이라는 빚을 지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분열된 에큐메니컬(Ecumenical) 정신을 다시 회복해 새로운 연합운동을 전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효상 목사(시인, 수필가, 칼럼니스트, 다산문화예술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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