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영민 칼럼] 살아있는 역사들

오렌지카운티제일장로교회,엄영민 목사

교회를 섬기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믿음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믿음의 선배들,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어느 어른이든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너무나 귀한 사연들이 많다. 그래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기 시작하면 몇날 며칠을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인데 나처럼 전후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일제시대를 거쳐 분단 그리고 6.25 동란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살아있는 역사책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우리 나이 또래만 해도 일본의 침략과 핍박은 그저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을 뿐 실제적인 체험이 없다. 그러나 드문드문 일제시대를 지내온 연세 많으신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 속에서 겪었던 고난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일제시대 학교를 다니면서 한국말을 못하게 해서 많이 힘들었다는 이야기, 더러는 일본식 교육에 익숙했던 나머지 일본이 우리나라인 줄 알고 있다가 일본이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엉엉 울었다는 이야기, 징용을 당해 동남아의 전선을 떠돌던 이야기나 혹은 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겪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면 내가 직접 체험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일들이 생생하다.

해방 이후 한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큰 사건들이야 책에서 배우지만 역시나 살아있는 증인들을 통해 듣는 증언만큼 생생한 것은 없다.

오래 전 돌아가신 한 집사님은 해방이 된 직후 북한에서 소련군을 안내하는 일을 보다가 겪은 체험을 말씀해 주셨는데 소련군이 동네에 들어가 부녀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거부하자 총을 들이대며 협박했다는 것이다. 이 집사님이 쏠테면 쏘라고 대들자 소련군은 식식거리며 총을 거두고 떠나더라는 말씀도 하셨다. 그 집사님은 그저 지나온 이야기로 하셨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그 집사님을 마음으로 존경했었다.

또 교회 권사님 중 한 분은 어린 시절 북한에 김일성이 들어올 때 멋모르고 꽃을 들고 나아가 그를 환영했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그리고는 마침내 비극의 6.25 동란이 터졌는데 이 또한 전후 세대들로서는 글이나 사진을 통해서 볼 수 밖에 없는 역사다. 그러나 온 몸으로 전쟁을 체험한 증인들의 이야기는 역사 그 이상이다.

어느 분은 전투에 참여했다 부상당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그 때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실 때 전쟁의 끔찍한 참상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어느 장로님은 중공군 개입 시 현장에 있다가 피리를 불며 개미 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들을 목격하셨는데 개중에는 미처 무기가 없어서 손에 막대기를 들고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목격담을 들으면 지금도 중공군의 피리소리와 함성이 들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때론 역사적인 영적 부흥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 증인들도 드문드문 계신다. 산정현교회를 다니고 주기철 목사님의 설교를 직접 들으셨던 분도 계시고 초기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셨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아쉬운 것은 이런 역사와 믿음의 산 증인들이 조금씩 조금씩 우리 곁을 떠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살아있는 역사를 들을 때마다 그것들을 좀 기록해 두시라고 부탁은 드리지만 연세 드신 어른들이 현실적으로 그리하기가 쉽지 않아 보이는 것 같다. 어찌 됐든 핵가족 시대 혈연의 가족과 비교할 수 없이 넓고 큰 교회 가족 안에 살아가면서 많은 믿음의 선배, 인생의 선배들로부터 이런 산 교훈과 지식들을 얻는 것은 또 다른 은혜이다. 부디 귀한 어르신들이 오래오래 건강 장수하셔서 젊은 세대에게 살아있는 교훈들을 더 많이 남겨 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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