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보니 엠(Boney M)’이라는 디스코 밴드 그룹이 불러 인기를 끌었던 “By the river of Babylon(바빌론 강가에서)”의 곡의 내용은 시편 137편이 배경입니다. 이 노래는 1978년 싱글로 녹음, 출시되어, 영국에서 5주간 1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당시 매우 인기를 얻었습니다.
By the river of Babylon
There We sat down
Ye-eah We wept
When We remember Zion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우리는 슬퍼하네
시온을 기억하며
바빌론 강가에 앉아 우리는 슬퍼하네
한국에서는 이 노래를 개사해서 이렇게 부르기도 했습니다.
흘러가는 강 물결을 바라봅니다
나뭇잎 하나 살며시 띄워봅니다
물결 따라 정처 없이 흘러갑니다
이제는 다시 볼 수도 없을 겁니다
이 노래의 모티브인 시편 137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BC 6세기 경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남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서 드린 예배를 기억하면서 불렀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슬픔의 상황을 빠르고 경쾌한 디스코 풍으로 불러 더 슬퍼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시 137:4) 시편 기자는 기원전 6세기 유다의 ‘바벨론 유수(BC 597-538)’ 동안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비록 우리의 상황과는 다를 수 있지만, 이 질문에서 우리는 깊은 슬픔과 혼란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 우리 마음에서 희망이 사라졌는데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베냐민 아나돗의 선지자로 ‘정치적인 외톨이’였습니다. 그에게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향해 바벨론에게 복종한 죄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는 어려운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예레미야가 “당신을 대신하여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너무 어립니다”라고 말하며 이 일을 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렘 1:6) 예레미야는 왕과 선지자들에게 마음이 없는 예배나 거짓된 믿음을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약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의식을 지키는 것 이상인 신실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일깨웠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이 기원전 586년에 일어난 바벨론의 점령과 포로 생활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셨습니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지만, 점차 그는 아무것도 바벨론의 침략으로부터 유다를 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백성들의 죄가 너무나 깊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렘 30:12)
예레미야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에 재앙이 올 것이라 예언했고 그대로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파괴했으며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애가’를 통해 황폐해진 도시를 보며 슬퍼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의 사랑과 인자하심은 한계가 없음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지 못한 백성을 벌하기 위해 느부갓네살 왕을 사용하셨습니다(렘 25:9). 하나님은 단지 한 민족의 신이 아니라 열방의 왕이시며 그분의 아래 모든 백성들이 낮추어집니다. 이방의 우상과는 다르게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며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한 왕이시며, 그가 진노하실 때 땅이 진동합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읽을 때마다 전능하시고 두려우시며 비교할 수 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이방이 능히 당하지 못하느니라”(렘 10:10)
예레미야는 때로 우리 삶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때에는 우리 죄를 돌아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더욱 열정적으로 순종하며 예배 드리기를 권고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 무거워 기쁨으로 찬양 드릴 수 없을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묵묵히 행함으로써 여전히 그분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한편 예레미야는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을 드러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그분을 아는 마음을 주십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렘 24:7)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고칠 수 없는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매 시온을 찾는 자가 없은즉 내가 너의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렘 30:12-17)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한지 깨달을 때, 그분께 나아가 간절히 간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9:13).
우리는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시며, 그 언약은 율법을 사람의 마음에 새겨 우리가 그분을 알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렘 31:31-34).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 약속이 성취된 것을 경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인 은혜와 용서의 언약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는 바벨론이 아니라 죄의 묶임으로부터 구원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한 때 유대 포로들에게 주어졌던 그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구원의 사역을 통해 우리는 고난의 때에조차 여전히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는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고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기 때문입니다(렘 31:12-13).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유다 백성들을 보며, 곧 닥칠 백성들의 죄와 피할 수 없는 나라의 운명으로 인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게 예배하게 될 때 우리 역시 하나님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슬퍼집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우울함은 하나님께서 유다가 바벨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을 알게 되면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과 약속하신 새로운 언약을 통해 구원해주실 것을 예언해주셨습니다. 그분은 다윗의 한 의로운 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렘 33:14-18). 눈물의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새로운 언약의 선지자였습니다. 이전 언약은 하나님에 대한 유다의 불충성으로 인해 깨졌으며 재앙을 초래했습니다(렘 11:1-12).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과 새로운 언약을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렘 31:33).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 위해 오셨으므로 과거의 언약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심으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게 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언약은 다윗의 자손이자 “이 잔은 내 흘린 피로 세운 하나님과 너희 사이의 새로운 언약이니”(고전 11:25)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식탁을 기념하기 위해 모이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아들을 통해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성령님으로 우리와 계속 함께 사시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며 또한 사도 요한에게 주신 환상의 성취입니다(계 21:3).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선포는 무시되었고 예루살렘은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레미야 사역의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예레미야는 만족에 안주하는 환경 속에서 예배가 성장할 수 없음을 일깨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과거 하나님의 백성들처럼 종교적인 예식이나 관습을 중요시하고 마음을 뺏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진실한 예배자가 아닌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보고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실패와 실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님을 따라 사는 삶을 예언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법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배가 단지 예식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서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교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알려주었습니다.
율법주의는 진정한 예배를 억압합니다. 이는 단순한 습관으로 예배하는 것,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기쁘게 하는 예배, 죄책감을 피하기 위한 의무,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형태이든지 율법주의는 좋은 대안이 아니며 그것은 잘못된 예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죄에서 돌아서려는 뜻이 있다면 하나님도 용서해주실 뜻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렘 51:5).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고 해도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면 여전히 두렵습니다. 예레미야는 그의 백성들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으나, 예루살렘에 파멸이 닥치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히브리어로 ‘어떻게?’의 의미가 있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예레미야 애가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로부터 이렇게까지 멀어졌을까요?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이 왜 멸망해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동안 우상숭배와 부정한 것을 회개하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폐허가 된 도시를 보면서 ‘어떻게?’라고 외친 것은 예루살렘이 회복하고 일어설 것에 대한 소망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몰락은 단순히 전쟁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애 1:5).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반복적인 죄를 벌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화염에 휩싸이고 성전이 파괴되었으며 살아남은 자들은 바벨론으로 포로가 되어 끌려갔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엄중하고 고통스럽게 내려졌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함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인정하면서도 슬픔과 낙담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는 솔직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함을 배우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며 그분의 변함없는 성품을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나이다”(애 5:19)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좋은 말을 듣기보다는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그 친밀한 관계는 불과 역경을 통해 우리의 불순물들을 빼낼 때 시작된다는 사실을 예레미야는 말해줍니다. 예레미야 애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과 회복에 대한 간구로 끝을 맺습니다(애 5:19-22). 우리의 삶이 산산 조각났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언제나 기다리시고 새롭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3)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