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이 본 성혁명사(59)] 킨제이 보고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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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성길 명예교수

이미 독자들께서 느끼시듯, 50년대의 미국 성문화는 요즘 우리나라의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5-60년대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성혁명적 변화가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가 빌헬름 라이히, 알프레드 킨제이, 죤 머니 같은 지적 (좌파) 엘리트들에게 어떻게 공격당하고 어떻게 정신을 못차렸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빌헬름 라이히의 기독교 성윤리에 대한 공격은 알프레드 킨제이(1894~1956)에 이르러 불이 붙었다. 그는 1947년 인디아나 대학 내에 성연구소를 설립하고, 5,300 명의 백인 남자와 5,940명의 백인 여자들을 대상으로 521개의 질문으로 섹슈얼리티에 대해 인터뷰 조사하였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면담대상이 이차세계대전 동안의 혼란스런 성문화를 겪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 질문에는 혼전 및 혼외 섹스, 음경크기, 자위, 동성애 경험, 소아성애, 수간경험,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인터뷰 조사 결과는, 1948년 『인간남자의 성행동』을 그리고 1953년 『인간여자의 성행동』으로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을 소위 “킨제이 보고서”라 한다.

킨제이보고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성인 남자의 85%, 성인 여자의 48%는 혼전 섹스를 한다. 남자 50%와 여자 40%는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여자 71%는 불륜이 결혼을 망가뜨리지 않았다고 했다(일부는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미국의 남자 69%가 창녀를 만나고 있다. ② 여성들도 생식 외 성(쾌락을 위한 성, 자위, 또는 불륜 또는 동성애)을 생각하고 있고, 오르가즘을 추구하고 즐기고 있다(당시 여자는 오르가즘을 모른다는 신화가 퍼져 있었다) ③ 미국 사람들은 온갖 도착적인 형태의 도착적 성행위를 하고 있다. 특히 가학-피학증(sado-masochism)이 빈번하다. ④ 미국에 동성애자가 매우 많다. 일생동안 한번이라도 오르가즘을 동반한 동성애적 경험을 한 사람이 남자의 37%(여자 13%)에 달한다.(이후 동성애자가 인구의 10%라는 신화가 퍼졌다) ⑤ 농촌 소년 17%가 동물과 섹스를 한다. 이 모든 행동들은 “과학적으로”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

두 번째로 충격을 준 것은 소아성애를 정당화한 것이었다. 즉 어린 아이도 성욕을 가지고 있으며, 성적 자극을 하면 쾌락을 즐긴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의 연구자료에 보면 생후 5개월 된 유아도 적절히 자극하면 소리지르고 발작하는 등 여러 번의 오르가즘은 보였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어린이들은 유아 때부터 어른들에 의해 그들의 성적 욕구가 만족되도록 격려되어져야 한다.

1953년 출판된 책에서 킨제이는 여성에 있어 오르가즘이 음핵근원인가 질 근원인가 하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프로이트와 당시 정신분석가들과 대부분의 정신과의사들은 질 오르가즘을 옹호하고 있었다. (나중 소위 G-스폿 이론이 나왔다) 프로이트가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하던 페미니스트들은 음핵 오르가즘 이론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질 성교를 위한 남자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는 미디어에 대서특필되면서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킨제이는 지식인들 사이에 영웅시 되었다.(나중 마스터즈 등이 음핵 근원의 오르가즘을 “실험적으로” 입증하였다)

당시 매스콤들은 킨제이가, 당시 미국인들이 입으로는 순결을 말하지만, 비밀리에 순결과 다른 성생활을 하고 있음을 폭로하였다고 ”선정적으로” 대서특필하였다. 그는 곤충학자였지만, 성을 언급하는 것이 타부시되었던 서구 세계에 성을 공개 토론에 끌어내고, 생식 아닌 쾌락 목적의 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를 퍼트렸다. 그런 의미에서 킨제이는 “성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누린다. 그는 유명해지고 “Dr. Sex”로 불리었고, 갈릴레오, 다윈, 프로이트에 비유되었다. 당연히 책은 엄청나게 잘 팔렸다. 출판된지 2개월 내에 20만부가 팔렸다.

킨제이는 기독교가 사람들에게 섹스에 대해 무지와 수치심을 심었다고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그는 “성에 관한 우리의 모든 법들과 관습들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공인된 요구에 기초한다. 그리고 가족의 기초에는 아버지가 있다.”고 말하면서, “아버지의 제거”와 가족제도 파기를 시사하였다.

킨제이는 알려진 양성애자였고, 거기 더하여 소아성애자 및 사도마조히스트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자해했고 1956년 8월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사후에 그의 “과학적” 주장, 즉 많은 사람들이 자위, 혼전 성, 이혼, 동성애, 수간, 등을 하니까 “정상”이다라는 주장이 널리 홍보되었다. 즉 60년대 성혁명의 길을 닦았다. 당연히 비판과 반론도 격렬하였다. 킨제이의 과학에 대해서는 학자들이, 그의 성윤리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계속)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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