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경험 중 하나가 있다면 ‘배신’이라 할 수 있다. 배신은 인간의 마음에 깊은 자상(刺傷)을 입히는 감정이다. 사랑했던 배우자, 믿었던 친구, 존경했던 스승, 아끼던 제자의 관계처럼 배신은 신뢰 관계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 배신한 사람에 대한 신뢰가 클수록 상처는 말할 수 없이 깊다.
이스라엘의 철학자 아비샤이 마갈릿은 배신에 관해 소중한 정의를 내렸다.
[2] ‘배신은 두터운 인간관계를 붙인 접착제를 떼어내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배신>에서 “배신이 성립하려면 그 관계에 상처가 생겨야 한다… 오직 심각한 신뢰의 심각한 파괴만이 배신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소중하게 여긴 사람의 배신은 두터운 인간관계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지옥을 9층으로 구분해 놓고, 배신자를 가장 지독한 지옥에 둔 것을 보아도 배신이 인간에게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3] 배신의 가장 부정적인 영향은 깊은 불신과 관계 단절이란 쓴 열매를 남긴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배신이 있었다. 그중 가장 영향력이 컸던 배신은 ‘유다의 배신’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다의 배신보다 더 큰 배신은 ‘베드로의 배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십자가 수난을 여는 날 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 26:31)고 예고하셨다. 그때 수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마 26:33)고 대답했다.
[4] 그것은 베드로의 진심이었다. 하지만 진심이 항상 진실이 되진 못한다는 사실을 당시는 베드로도 몰랐을 것이다. 베드로가 스승 예수님을 배신한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교훈과 충격을 준다. 우리 역시 그럴 가능성이 있음을 늘 인지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12제자들 중 예수님을 제일 사랑했다고 하는 수제자 베드로가 어째서 주님을 배신했는지 그 이유와 원인을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5] 첫째는 ‘자기 과신’ 때문이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한 마디로 자신의 약함을 인식하지 못했단 말이다.
둘째는 ‘예수님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예수님이 어떤 능력을 가지셨는지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어야 할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그분의 예언을 부정해버렸다(마 26:34-35).
셋째는 ‘기도 부족’ 때문이다.
[6]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베드로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 26:40-41)고 하셨을까?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분의 기도 요청도 무시했다.
'자기 과신'과 '주님 불신'과 '기도 부족'으로 인해 그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7] 그러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갈릴리 바다가에서 만났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0:15a).
여기서 우리는 “이 사람들보다 ~ 더”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 그리 말씀하셨을까?
[8] 마태복음 26장에서 베드로는 “다른 모든 제자들과는 달리 자신은 배신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비교급으로 자신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절하게 실패를 경험한 지금도 여전히 다른 제자들보다 더 사랑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이때 베드로가 답한 내용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0:15b)
[9] 이전에 고백했던 비교급의 자신만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주님을 사랑한다고만 고백한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이다.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을 제대로 인지한 것이다.
여기서 또 주의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고 그가 다른 제자들과 흡사하거나 그들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부인하지 않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문제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은 옳은 것일까?
[10]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형편에 놓였다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까? 아닐 것이다.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처럼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도망갔더라면 그분을 부인하거나 저주할 이유가 없지 않았겠는가. 비록 멀찌감치 따라갔지만 그래도 그는 함께 동행한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과는 차별화 된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이때 베드로에게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11] 둘째는 제자인 것을 들켜서 잡힐까봐 두려워서 멀찌감치 따라갔고 부인도 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선 안 된다는 사랑의 마음이 다른 제자들보다 컸기에 그분을 따라갔다. 하지만 자기도 잡혀서 예수님처럼 수난 당하고 죽을까봐 두렵기도 했다. 당시 이 두 가지 마음이 그 속에 공존하고 있었음을 예수님은 누구보다 잘 아셨다.
그래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에 '양을 치라!'는 중요한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12] 비록 배신하고 비겁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는 또 다른 제자와 함께 스승의 뒤를 따라갔던 몇 안 되는 제자였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12명의 제자들 중 나머지 10명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의 이야기에서 “나머지 아홉 은 어디 갔느냐?”라고 소리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주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문제없이 강하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13] 목숨을 걸고 순교할 만큼 대단한 사랑은 기대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그분을 따라갔다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찾아오셔서 회복시켜주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오늘 나는 베드로를 욕하고 정죄할 수 있을까? 없다. 나 역시 온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멀찍이서라도 주님을 따라간 베드로 정도의 사랑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더 큰, 배신하지 않을 담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는 하루가 되자.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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