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메니우스와 21세기 기독교 교육의 방향과 과제(1)

오피니언·칼럼
기고

※ 본지는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가 지난 6월 30일 경기도 광주 유나이티드 히스토리 캠퍼스에서 열린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설립 22주년 학술심포지엄에서 주제발표한 논문을 연재합니다.

[서언]

정일웅 박사

오늘 한국 코메니우스 연구소 설립 22주년을 맞는 기쁜 날,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축하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시간 강연주제는 ”코메니우스와 21세기 기독교 교육의 방향과 과제“에 관한 것입니다. 제목이 좀 거창해 보이지요? 그러나 강연 요지는 코메니우스란 과연 어떤 사람인지? 간략한 인물소개와 그가 남긴 교육의 정신이 무엇인지를 되새겨보면서, 앞으로 코메니우스 연구소가 이곳 ‘히스토리 캠퍼스’에서 어떤 일들로 한국교회를 섬기며 활동하게 될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1. 코메니우스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먼저 그의 인물됨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17세기 유럽에서 활동했던 인물이며, 지난 15세기경 보헤미아의 종교개혁자 얀 후스(J.Hus,1369-1415)의 개혁 정신을 가장 잘 따랐던 형제연합교회(Unitas fratrum)의 목사요, 후에 그 교회의 3번째 감독이 되기도 했다. 그는 1592년 동유럽의 작은 나라,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지역에서 탄생하였다. 오늘날 체코공화국이다. 그는 일찍 부모를 잃은 고아로써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16세의 늦은 나이에 형제연합교회의 라틴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나 형제연합교회는 총명한 코메니우스를 일찍 지도자감으로 주목하여, 그 당시 칼빈주의 철학과 신학을 가르치던 독일 헤어보른과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학업을 마친 후(1614), 그는 모교에 돌아와 라틴어교사가 되었고, 1616년 결혼 후, 곧 목사로 안수받고, 학교의 교장이 된다. 그리고 1618년 풀넥의 작은 도시에 있는 형제연합교회의 목사가 된다. 그런데 바로 그해가 남성 1/3이 희생당한 유럽의 비극적인 30년 종교전쟁이 시작된 해였다. 가톨릭 편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는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 있는 코메니우스와 지도자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고, 그 일로 잠시 코메니우스는 은둔생활에 머물렀으나, 1627년 황제는 또다시 프로테스탄트에게 개종명령을 내려, 그는 더이상 고국에서 살지 못하고 따르는 형제연합교회의 성도들(천여명)과 함께 망명길을 떠난다(폴란드 리싸).

그러나 망명 생활에서 코메니우스는 기독교적인 학문의 깊은 연구로 인간교육과 관계된 여러 권의 책들을 출판하여 유명인사가 된다. 대표적인 것은 ‘어머니학교의 소식’, ‘보헤미아의 교수학’, ‘열려진 언어의 문’, ‘자연과학 개론’, ‘대교수학’, ‘세계도해’ 등이었다. 특히 ‘열려진 언어의 문’은 유럽 여러 나라말로 번역된 유명한 책이 되었다. 그 이유는 언어를 쉽게 배우는 원리를 그 책이 잘 밝혀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코메니우스는 오늘날까지 언어학자로, 또한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로 불리게 된다. 1648년 30년 종교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에서 루터파와 칼빈파는 프로테스탄트교회로 인정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형제연합교회는 인정받지 못해, 코메니우스는 목사직과 감독직을 내려놓고 교회를 해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한다. 그리고 첫 망명지였던 폴란드 라사 마저 전쟁에 휩쓸려, 도시가 불타면서 코메니우스의 집과 도서들이 거의 소실된다. 겨우 가족과 함께 몸을 피한 코메니우스는 1657년 마지막 망명지 암스테르담으로 가게 되었고, 거기서 14년을 더 살다가 1670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무덤은 지금도 암스테르담 근교 나르덴에 있는 프랑스 개혁교회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돌아보면, 코메니우스는 그 당대(1640)에 벌써 교육철학자로 유럽에서 이름나 있었다. 그 이유는 1637년에 발표한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논문 때문이었는데, 이 글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지혜를 가르치는 범지혜(Pansophia)의 교육을 제창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감동된 유럽 여러 나라는 코메니우스를 데려다가 범지혜학교와 범지혜대학을 세우려 했다(프랑스, 영국, 미국, 스웨덴, 화란). 그때 미국에 하바드 대학이 설립되어(1637-38), 그를 초대총장으로 초청했으나 코메니우스는 형제연합교회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역시 망명 생활에서도 계속해서 많은 연구를 통하여 여러 문서를 남기게 되는데, 전 생애 동안 약 250 여종을 출판했으며, 그 가운데서 오늘까지 발견된 것이 약 200여 종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유럽의 기독교 역사는 이처럼 유명했던 교육철학자요, 교육신학자인 코메니우스를 곧 점점 잊어버리게 된다. 물론 독일을 비롯하여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그의 교육적인 문서들에 담겨 있는 교육체계와 학교교육이론, 교재론, 교수 방법론 등을 확인하고 코메니우스를 “교육학”의 아버지로 존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는 코메니우스를 단지 교육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 그가 그토록 중히 여겼던 신학과 특히 신 중심적인 인식론은 계몽주의적 영향으로 이성 중심의 인식론에 밀려 거의 학문 세계에서 배제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문서들은 그런 방향에서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었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는 데가르트와 함께 17세기 유럽의 시대 전환의 분기점에 서 있던 역사적 인물이었다. 오늘날 역사연구는 근세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가르트는 17세기에 떠오르는 태양이며, 코메니우스는 석양에 지는 해로 비교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아이러니하게 코메니우스가 죽은 지, 265년이 지난 1935년(20세기 중엽), 그가 남겼다는 소문만 떠돌던 7권의 “세계개혁의 제언서”원고가 발견된다. 라틴어 원본의 제목은 “인간적인 일들의 관계개선에 대한 보편적인 제언”(De rerum humanarum emendatione catholica consultatio)이었다. 이 대작의 발견으로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코메니우스의 학문은 새롭게 평가되어 주목받는 인물로 등장하게 된다. 1966년 국제 코메니우스 학회가 설립되면서, 이 문서들은 체코와 동서독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었고, 코메니우스는 17세기의 교육학자요, 철학자요, 신학자로서의 3가지 명예를 새롭게 얻게 되었다.

7권에 담긴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1648년 30년 종교전쟁이 끝났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 코메니우스는 여전히 망명 생활에 처해 있으면서(화란),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는 유럽 사회의 학문과 정치와 교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떻게 유럽 사회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가 되게 해야 할지를 꿈꾸게 됩니다. 특히 그 시대에 새롭게 일어나는 이성 중심적 사고에 의한 계몽주의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자연과학의 영향을 기독교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어떻게 기독교의 하나님이 새로운 사고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할지? 어떻게 성경의 진리가 모든 학문의 중심이 되게 해야 할지? 한마디로 17세기 시대변화의 도전을 극복할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특히 신앙의 생동력과 실천은 외면한 채, 교리대립과 교회분열에 빠진 종교개혁의 주도그룹인 정통주의(루터파와 칼빈파)를 크게 염려하며, 새롭게 일어나는 경건주의 운동을 독려하면서, 동시에 교회 연합을 강조하면서, 코메니우스는 유럽세계의 완전한 개혁방안들을 구상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7권으로 구성된 세계개혁의 제언서에 담긴 핵심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과 정치와 교회의 개혁과제는 하나님의 요구요, 명령임을 학자들과 정치인들과 교회지도자들에게 호소하면서, 그들이 책임져야 할 시대적인 소명과 사명을 일깨우는 선지자적인 글을 제시하였다(제1-2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모든 지혜를 배워, 신 형상과 인간성 회복을 위한 실천방법론인 모두를 위한 교육서(Pamapedia)를 제시한다(3-4권). 마지막에 교육적이며 정치적이며 신학적인 개혁실천의 구체적인 방법론(Panorthosia)을 제시하였다(5-6권).

이러한 문서들의 내용을 확인한 유럽학자들은 코메니우스는 17세기의 인물이지만, 그가 남긴 사상들은 그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인류 미래의 교육과 개혁을 위해 여전히 그 유효성과 현실성을 지닌 교육 철학적이며, 교육 신학적인 것들임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400년이 지난 오늘날, 21세기에도 여전히 인류의 근본문제 해결에 필요한 중요한 지혜들이 된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코메니우스는 인류 미래를 위한 희망의 신학자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적인 신 중심적인 안식론을 강조한 코메니우스는 17세기에 지는 해로, 데가르트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비교되었으나, 21세기 오늘날 코메니우스의 재발견은 반대로 데가르트가 지는 해이며, 코메니우스가 떠오르는 태양으로 불리게 된다. (계속)

정일웅 박사(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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