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세계대전이 서구의 성문화에 미친 영향은 대단히 파괴적이었다. 그 후유증은 20여년의 잠복기동안 사회의 각계 각층에서 연기를 내뿜다가, 60년대 초에 성혁명으로 폭발하였다. 즉 60년대의 인류사적 성혁명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원인이 있는 것이다. 성혁명은 전후 주로 미국에서 시작되었다. 유럽은 전후 복구에 바빴는지, 비슷한 혁명은 68 학생혁명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미국의 경우, 고향으로 돌아온 병사들은 평화시대의 사회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제대 장병의 사회복귀를 다룬 1946년작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는 그들의 “외상(트라우마)후 스트레스 장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트라우마에는 전장의 포화 속에서 느꼈던 죽음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매춘, 프리섹스, 성폭력, 매독 등등이 뒤섞인 혼동스런 성 경험도 미국의 순진한 총각들에게는 트라우마였다.
그동안 여자들도 억압되었는데, 후방에서 문란성으로 남편이거나 연인인 병사들의 정신을 약화시키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그동안 공장에서 돈을 벌면서 독자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전후에 여성들은 군수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왔지만, 심리적으로는 전쟁 전의 억압된 삶으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전쟁 후 사회의 질서정연함이 회복함에 따라 사람들은, 전쟁으로 인한 충격에 대한 반응으로 그리고 군사문화에 길들여진 탓인지, 국가 사회적 규범에 복종적이 되었다. 남자들은 성실하고 강한 책임감을 갖도록 요청되었고, 여자들은 여성스럽고 사랑스럽고 순응적이 모습을 갖도록 격려되었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어른을 존중하라고 가르쳤다. 제복의 군인은 존경받았고 소방관과 경찰관은 마을의 기둥이었다. 주일에는 가족들은 다 같이 교회에 출석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1950년대 성서에 기반한 또는 초기 기독교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이 만들어졌다. “쿼바디스”(1951년), 성의(1953년), 십계 (1956년), 벤허(1959년) 등등의 영화에는 당시 바람직한 남성상과 여성상이 그려지고 있다.
가정의 안정은 국가안보와 연결되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냉전시대 동안 공산주의 소련의 실제적 또는 상상적 위협에 대해, 제3차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의 위협에 대응하여, 미국 사회는 보수적이 되어갔다. 상원의원 매카시(Joseph McCarthy 1909-1957)가 좌파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미국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전체 사회를 감시하고 억압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미국인들은 공산주의 소련의 위협 아래서 매카시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FBI의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는 더욱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는 그들의 유력인사들의 비밀을 조사한 문서들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몇 대의 대통령을 거치면서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대다수 미국인들은 후버가 진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영화들은 사회의 공적을 무찌르는 FBI의 활동을 찬양하였다. 그래서인지 당시 만화나 영화에서 수퍼맨 같은 히어로의 활약이 인기를 끌었다. 후버와 FBI는 미국 사람들 간에 권위적 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조만간 권위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전쟁동안 미국 본토는 전쟁의 피해를 직접 당하지 않았다. 전후 군수 산업시설은 그대로 일반 상품 생산 공장으로 전환되었다. 경제가 부흥하여 50년대에 풍요한 시대가 도래하였다. 또한 전후 평화시대가 되자, 전통적인 성문화가 복귀하였다. 전장에서 귀환한 남자들은 전장의 악몽을 뒤로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었고, 열심히 직장에서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어야 했다. (아니면 이상적 남성상에 실패하는 것이었다) 여자들도 전후에 공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결혼하고 요리하고 청소하고 자식을 양육하였다. 새로이 결혼한 젊은이들은 도심을 떠나 교외에 건설한 뉴타운에 지은 집에 살았다. 집집마다 거실에 TV, 냉장고 등이 등장하고 차고에는 크고 화려한 자동차가 있었다. 온 가족이 TV를 보면서 저녁식사를 하는 것이 하나의 전형적인 가족생활의 풍경이 되었다. 그들은 주말에 이웃들과 뒤뜰에서 바비큐를 즐기거나 자동차로 야외 드라이브를 즐기었다. 1958년에는 드라이브인 영화관이 4,063 곳이나 되었는데, 거기서 젊은이들은 연애를 했다. 그 연인들은 일단 데이트를 시작하면 천천히 그러나 확고하게 조만간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아이들은 온갖 장난감을 선물 받으면서 풍요하게 그러나 약간 제멋대로 자랐다. 전쟁 중의 “성문란”은 어디 간 듯 없어지고, 안락하고 풍요하고 건강하고 화목한 가정문화가 꽃피었다.
그러나 차회 칼럼에서 자세히 기술되겠지만, 이러한 성문화는 1948년과 1953년에 출판된 두 권의 킨제이 보고서에 의해 타격받는다. 킨제이 보고서는 당시 “건강한“ 기독교적 가족문화를, 과학의 이름으로, 위선적이라고 공격한 것이었다. (계속)
민성길(연세의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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