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재의 혜암칼럼 ⑨] 시편 139편과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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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재 박사(한신대학교 명예교수, 혜암신학연구소 편집고문)

시편 139편은 영감으로 꿰뚫어 본 생명의 유전자 창발(創發) 이야기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 문화신학) ©혜암신학연구소 제공

역사를 통하여 일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껴보려거든 이스라엘이라는 기이하고도 독특한 민족을 진지하게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다. 시편은 이스라엘 시문학이 인류에게 남긴 놀라운 선물이지만, 그중에서도 시편 139편을 읽노라면, 이 종교시가 지금부터 무려 2,500-3,000년 전의 고대 이스라엘 영성시인의 작품인가 의심되리만치 놀라움을 금하기 어렵다. 특히 시편 139:13-18절을 읽어보면 20세기 분자생물학의 놀라운 업적이라고 자부하는 생물유전자 DNA 이론을 예견하는 느낌이 든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으로 해당부분을 먼저 조용히 읽어 본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13절) 내가 이렇게 빚어진 것이 오묘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 놀라워, 이 모든 일로 내가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내 영혼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압니다.(14절)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15)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16) 하나님, 주님의 생각이 어찌 그리도 심오한지요?(17) 내가 세려고 하면 모래보다 더 많습니다. 깨어나 보면 나는 여전히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18절)

마치 에덴동산에서 금기시 되어있던 생명 나무 과실을 따먹고 눈이 밝아져 자기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되고 놀라운 지혜를 갖게 된 아담과 이브처럼 인류가 20세기에 이룬 가장 놀라운 과학적 업적 2가지는 물리학 분야에서 원자핵 비밀을 밝혀낸 일과 생물학 분야에서 세포핵 속에 담겨있는 유전자(DNA)의 화학적 구조와 형질의 유전법칙을 읽어낸 사건이다.

원자의 비밀을 밝혀낸 결과로 원자폭탄 제작, 원자력 발전소, 방사성 치료법 등 문명이기가 발명되었다.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낸 결과로 의학적 질병과 치료, 식품 품종개량, 맞춤형 인조인간(cyborg) 제작까지를 내다보는 시대가 되었다. 금기시되었던 에덴동산 과실을 따먹고 지혜의 눈이 밝아진 대신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질고를 초래했듯이, 원자핵과 세포핵 유전자 비밀을 알아낸 호모사피엔스는 그 사건이 미래의 번영과 파멸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분자생물학자가 아닌 신학자가 생명을 구성하는 세포나 세포핵 안에 들어있는 유전자(DNA)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시편 139:13-18을 조금 더 실감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고등학교 생물학 교과서에서 언급하는 가장 기초적인 생물학 지식을 돌이켜 볼 필요가 충분히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 개체의 몸은 75조에 이르는 세포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에서 수백만 개의 세포들이 날마다 새로운 세포로 교체된다. 세포는 인체의 기본단위이다. 놀랍게도 세포 기능은 다양해서 손톱, 머리털, 입안의 점막, 근육, 뼈, 혈액들이 모두 세포로서 구성되지만, 모든 세포 한 가운데에 세포핵이 있고, 세포핵 안에 개체 인간의 얼굴 모습과 오장육부와 생물로서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체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간의 유전체는 약 30억 개의 DNA(데옥시리보 핵산) 염기(鹽基)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너무나 전문적 지식이고 용어이지만 우리가 흔히 말하는 DNA는 "당, 인산, 염기의 결합체인 뉴클레오티드라는 단위 화학물로 구성되어있다." 각 세포마다 23쌍의 염색체가 들어있고 각각 절반씩 부모 유전자로부터 받은 것이다. DNA라고 부르는 단위 화학물질의 배열과 생화학작용이 다양한 아미노산을 만들고 수천 가지 다양한 단백질 합성의 지침과 암호기능을 한다는 것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되는 개략적인 현대 분자생물학의 핵심이다.

다시 오늘의 명상 성경 구절 시편으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의 어느 경건한 시인은 "주님께서 내 장기(臟器)를 내 어머니 모태 안에서 짜 맞추셨고, 어두컴컴한 태안에서 내 몸의 뼈조직들을 조립했다"고 직관적 표현으로 생명체 창발(創發)의 신비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2,500-3,000년 전 고대인이기 때문에, 유전자 구조와 그 발현과정에 관한 과학적 지식도 없고, 'DNA의 이중나선'에 관하여서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수정 후 며칠이 지난 배아(胚芽)가, 며칠 후부터 신비하게도 '배아줄기'를 이루며, 수없이 많은 세포분열을 하면서 '배아줄기세포들'은 간, 창자, 심장, 췌장, 근육, 뼈, 눈동자 색상까지를 조성하며 모태에서 10개월을 자란다.

시편 기자의 시어적(詩語的) 직관 표현의 노래와 현대분자생물학 전문과학자의 설명 사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 현대분자생물학의 놀라운 발전에 경의를 표하지만, 현대분자생물학이 생명신비체의 형성과정을 완전하게 다 해명한 것은 아닌 것이며, 영원히 신비로 남아있을 것이다.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이 너무도 크고 많다. 심지어 시편 기자는 노래하기를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다"(16절)고 고백한다. 나의 출생 후 누릴 생명의 첫날이 시작되기도 전에, 내 삶의 길이가 얼마나 될런지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시인의 위 고백을 현대 유전학적으로 굳이 빗대어 이해하려 든다면 자크 모노(Jacques Mono, 1910-1976)의 '유전자 결정론'이 될 것이며 아인슈타인(Einstein)이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는 물리법칙의 일관성 신념으로 대체될 것이다. 자크 모노의 생각을 잠시 되새김 해보자.

쟈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이 말하는 무신론적 과학적 휴머니즘

우리가 감탄의 마음으로 음미한 시편 139편 시인의 생각과 정반대의 입장을 대표하는 현대 과학자 한사람으로 자크 모노(Jaques Mono)의 견해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자크 모노는 1910년에 출생한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이며 196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세계적 과학자이다. 그가 1971년에 발간한 『우연과 필연』(한글판, 범우사, 1985)은 발간되자마자 수십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크 모노는 버트런드 러셀, 에드워드 윌슨, 리처드 도킨스 등과 더불어 현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4대 무신론적 과학적 휴머니스트 중 한 분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무신론, 유신론 논쟁이 진부하게 들린다면 다른 표현으로 말할 때, 자크 모노는 일체의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과 생명체는 우연과 필연의 결과일 뿐이다"고 말한 고대철인 데모크리토스의 충실한 지지자인 셈이다. 위에서 말한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 마지막 페이지에 쓰여있는 마지막 문장을 아래에 인용하여 음미해보기로 하자.

인간은 마침내 자기가 이전에 그 속에서 우연히 출현하였던 무관심하며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서 단지 홀로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운명이나 우리의 의무는 어느 곳에도 쓰여져 있지 않다. 인간은 혼자 힘으로 '왕국'과 암흑의 나락(那落)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것이다.(『우연과 필연』, 227쪽)

위에 인용한 그 책 마지막 결론적 문장은 섬뜩한 기분마저 들게 하는 세계적 분자생물학자의 냉정한 세계관과 인생관의 결정체가 담겨있는 문장이다. 그는 인간을 비롯한 생명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 자체가 물질의 '우연'한 사건이라고 본다. 인간 본성, 도덕성, 가치관을 규정하거나 미리 암시하는 일체의 권위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직 과학적 합리적 지성의 힘을 사용하여 고독하지만 인간다운 왕국을 만들어 가던지 지옥 나락 같은 파멸과 어둠의 세계로 전락하든지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크 모노의 세계관과 생명관에서 보면, 그는 임마누엘 칸트가 '감탄과 외경'의 마음으로 늘 묵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별이 총총한 하늘과 내 마음 속의 도덕법"(『실천이성비판』, 177쪽, 박영사, 1975) 따위도 한갖 '우연과 필연'의 물질적 법칙의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므로 감탄과 경외의 맘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서 본다. 자크 모노는 앙리 베르그송이 그의 명저 『창조적 진화』에서 말하는 생명현상의 특징으로서 '생명의 지속, 인격, 창조, 도약' 등등의 이론들도 비과학적인 생기론(生氣論) 철학의 아류일 뿐이라고 비판해 버린다. 그 모든 것들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형성되고 물질과 유전인자들의 물리생화학 법칙에 따라 형성된 '우연과 필연'의 결과일 뿐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자크 모노의 분자생물학자로서의 소신과 그의 입장은 과학자로서 소신이기 때문에 그 나름대로 존중하지만 수용할 수 없다. 수용 못하는 이유는 필자가 분자생물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만은 아니다. 자크 모노 못지않은 세계의 수많은 위대한 분자생물학자 중에는 우주와 생명의 출현과 진화가 단지 맹목적인 물질의 '우연과 필연' 결과라고 주장하는 모노 박사의 소신에 동의하지 않고, 과학자이면서도 대우주의 질서와 생명 진화를 35억 년의 거시적 눈으로 볼 때, 합목적적인 가치를 지향해가는 생명 운동의 신비한 현상을 '겸손한 지성과 경외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학자들도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크 모노는 종교의 영역을 원천적으로 부정하고, 과학과 신앙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관계라고 보는 입장인 셈이다. 자크 모노는 분자생물학자이면서 동시에 수준급의 철학자이지만 그는 자기가 이해한 과학을 일종의 '무신론적 종교 신념'으로까지 비약시키고 있는 것이다.

임마누엘 칸트와 자크 모노 경계선상에 있는 아인슈타인

과학과 종교, 이성과 영성, 인과적 결정론과 자유로운 창조성, 이들 상호관계에서 극단적 대립관계를 성숙한 자세로 임하는 20세기 대표적 과학자는 아인슈타인 박사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유대인 핏줄을 타고 태어난 20세기 대표적 물리학자이지만, 경직되고 도그마로 채색된 전통적인 초월적 인격신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광막한 대우주의 물리적 법칙 질서와 인간생명체 유전자 세계에 관계하여, "임기응변의 신"처럼 개입하고 간섭하면서 법칙적 질서를 스스로 어지럽히는 자가당착적 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자크 모노처럼 광막한 우주의 질서와 생명세계의 신비한 유전자 형성, 복제, 발현과정이 단순한 맹목적인 '우연과 필연' 결과라고 속단하지 않는다.

아인슈타인과 자크 모노와의 차이는, 대우주와 생명현상의 조화와 어떤 질서에 대하여, 인간이 합리적 과학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도 없고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신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다. 아인슈타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위대한 자연과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과 인간 자신에 대한 "인간의 지적 능력의 연약함과 한계성"도 볼 줄 아는 과학자였다.

아인슈타인은 자크 모노 보다도 그런 점에서 임마누엘 칸트에 더 가까운 과학자일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그의 딸에게 어떻게 도덕적으로 살 것인가 조언에서 말하기를 "자신을 위해서는 적게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주어라"(『아인슈타인』, 466쪽, 까치, 2007)고 조언했다. 단순한 말이지만 탐욕과 교만으로 병든 현대인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단순성의 압권으로서 명언이다.

신약성경 야고보서에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한 경건은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약1:27)이다. 시편 139편 이스라엘 경건한 시인의 영성적 직관의 시(詩)를 과학지식이 없는 고대인의 무지한 종교시라고 업수이 여기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자크 모노가 피력하는 '우연과 필연'의 과학 철학을 맹종하는 태도는, 20세기 문명 속에서 자기를 지키지 못하고 '세속에 물드는' 세속화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근대화(近代化) 혹은 세속화(世俗化)의 핵심 본질은 자연, 인간성, 그리고 모든 존재하고 생성되는 것들 속에서 신성한 것, 종교적인 요소, 설명할 수 없는 영성적 영감들을 철저히 배제하고 부정해가는 '자연의 탈주술화, 탈신성화'(막스 베버) 작업의 연장 행위이기 때문이다.

현대는 <표층종교에서 심층종교에로>(오강남), <전통축적물 종교에서 인간본성의 영성에로>(길희성),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갈릴리 복음에로>(화이트헤드), <예수믿음에서 예수살이에로>(이정배) 신앙의 거대한 패러다임전환이 진행되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에 시편 139편은 생명의 신비와 근원을 직관한 신앙시(信仰詩)로서 큰 울림으로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