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
무엇보다 그리스도 고난의 백미는 마지막 일주일 동안 벌어졌던 고난인데 이것을 특별히 신학적 용어로 ‘수난’이라 부릅니다. 특히 십자가상에 못 박히심과 죽으심을 전후해서 당하신 고난을 지칭합니다. 이것을 신학에서는 ‘파데인’ 즉 ‘해 받으심’(passion)이라 말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이러한 수난을 예수님은 이미 세 차례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고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마가와 누가보다는 마태가 더 리얼하게 묘사합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심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기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20:18~19)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언에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진짜로 체포되자 모두 흩어졌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행동도 이미 예수님이 예고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 기록된 바(슥 13:7)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막 26:31)
아니나 다를까, 제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배신의 길을 택하고 도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충성을 맹약하고 “절대로 저는 배신하지 않습니다!”라고 큰 소리 치지만 그런 것은 다 헛소리입니다. 인간은 철저히 자기 보신주의자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뜻으로 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배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기 몸과 생명을 버리고 희생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조금만 힘든 일이 있다 하면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는 사람들인데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내 모든 일생을 다 투자하는 인생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하찮고 버러지 같은 인생들임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며 주님께 우리의 이 가련한 처지를 솔직하게 아뢰고 우리에게 질고와 간고를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함을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씩 작은 일부터 실천하는 연습을 하고 단련해야 합니다. 교회의 작은 일에서부터 동참하는 것을 즐겨 하십시오. 토요일은 교회를 방문하는 날로 한번 작정해 보세요. 토요일에는 세상과 교제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친목 도모를 하는 날로 삼아 보세요. 가족 친지 일가는 그렇게 챙기시면서 교회 가족은 나 몰라라 하면 그리스도의 피 값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일에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의 일에는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90% 이상의 성도들이 주일에만 교회에 한 번 들린다고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교회에 희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오직 이기적인 성도들만 있다면 그들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유대인 지도자들은 예수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했다고 판결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를 로마당국에 넘겨주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 지역에서 오직 로마당국만 사형을 집행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예수님 자신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는 예언이 적중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사형 집행방법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오직 노예들이나 이방인 범죄자들에게만 십자가 처형을 실시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유대인들은 성경이 말한 대로 “나무에 달려 있는 시체는 하나님께 자주를 받은 것”(신 21:23)으로 믿었습니다. 즉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많은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가 자신에게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 가운데서 가장 나쁜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3)
이것은 다음과 같은 신앙고백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15주일입니다.
“나는 내가 몸소 당해야만 하는 저주를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 떠맡았다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은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를 전혀 알지도 못한 예수가 죽어야만 합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시고”(고후 5:21)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가 예수에게 돌려졌기 때문에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취급되었다고 암시해 줍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을 벗어나는 모든 길이 허용되지 않음으로 가장 완벽한 희생제물이며 채무이행으로 온 세상의 모든 죄를 다 속죄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인 예수의 죽음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살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분의 자발적인 희생제물 되심으로 우리가 이제 희생제물이 되는 것이 종료되고 은혜를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3. 결어: 고난의 깊은 의미
오늘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셨는가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물론 인간사에도 자식을 위해 헌신 희생하는 수많은 부모들의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비하하고 고난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죽음을 자발적으로 응하여 모든 구속의 대업을 이루신 예수님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잇는 모든 고난과 모욕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사람들이 행한 것은 정말로 악한 것이었습니다. 사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청한 사람들의 죄책을 명백하게 고발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그가...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그를 못 박아 죽였다”고 선포합니다(행 2:23).
이와 같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그를 십자가 위에서 처형했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죄인들의 본성, 곧 하나님과 그분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 줍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그를 정죄할 것이고, 이방인들은 그를 조롱하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그를 채찍질하고 마침내 죽일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소개된 마태복음 본문을 다시 읽습니다.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가더라”(마 27:27~31)
또한 예수님은 자기편의 사람들의 배신도 알고 계셨습니다. 한 제자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다른 제자는 그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형제들로부터도 배척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지상의 삶을 살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평생 쓰디쓴 물이 담긴 고난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바로 예수님의 이 고난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이미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바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행 2:23).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 받는 그 순간에도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목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코람 데오’의 지극한 순간일 것입니다. 그런데 더 위대한 것은 하나님은 고난 그 자체로만 고난을 허용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가장 따뜻한 손길이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지극한 사람의 능력으로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을 자발적으로 다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고난의 의미를 살펴보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은 하나님의 자비하신 섭리 가운데서 일어나고 움직이고 마감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모든 경륜을 시작하고 이행하고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고난과 함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가를 항상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최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