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에서 북한군에게 사살돼 소각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에 대해 해경과 국방부가 “월북을 입증할 수 없다”며 사과했다. 1년 9개월 전에 ‘도박 빚 등에 몰려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던 정부의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다.
당시 해경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현실 도피 목적으로 월북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뚜렷한 정황 증거도 없었고 동료 선원들까지 ‘월북 가능성 없다’라고 진술했는데도 처음부터 그렇게 몰고 갔다. 그러더니 이제 와 “월북 의도를 찾지 못했다”라고 말을 바꾼 것이다. 당시 군의 감청 기록이 ‘월북 증거’라고 발표했던 국방부도 “월북을 입증할 수 없다”고 했다.
해수부 공무원 사건을 ‘월북’으로 단정했던 해경과 국방부가 이제라도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한 건 늦었지만 다행이다. 정권이 바뀌자마자 180도 달라진 발표에 신·구권력 간의 충돌이라는 말까지 나오지만, 정부가 북한을 의식해 힘없는 국민과 그 가족에게 ‘월북 프레임’을 씌운 게 사실이라면 이제라도 공정하고 정확한 수사로 명명백백 밝혀야 할 일이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왜 월북으로 단정했는지에 대한 경위와 누가 그런 지시를 했는지를 밝히는 건 그동안 억울하고 분한 가슴을 억누르고 살아온 유족에 대한 국가로서 최소한의 의무다. 뒤늦게나마 고인과 유족의 명예가 회복되고, 조금이라도 위로받을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해경과 국방부가 잘못을 시인하고 여당이 이 사건을 전면 재조사하는 분위기로 가자 더불어민주당 비대위원장 우상호 의원은 “민생이 시급한데 이제 와 월북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하냐”고 했다. 심지어 설훈 의원은 “아무것도 아닌 일에 무슨 짓이냐”고 했다가 싸늘한 분위기를 감지한 듯 바로 “죄송하다”고 했다.
민생이 급하다는 민주당 지도부의 인식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글로벌 경제 위기가 닥쳤는데 지나간 일에 발목 잡혀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해수부 공무원 문제는 그냥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둘러싼 의혹일 뿐 아니라 북한과 관련해 지난 정권이 저지른 비리라면 어찌 그냥 지나간 일로 치부하고 덮어두겠나.
문재인 정부가 한일 과거사 문제로 국민적 반일 감정을 일으키고 그걸 정략적으로 이용한 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세월호 사건은 9번이나 조사하고도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하고도 아직도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 이들이 왜 이 사건만은 아무것도 아닌 지나간 일로 여기고 싶은 걸까.
자신들이 연관된 사건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날까 봐 그토록 염려하는 것이라면 처음부터 잘 했어야 했다. 당시 권력이 국민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고 최소한의 의무조치만 성실히 했어도 오늘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 오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도박 빚에 쫓겨 월북한 배신자의 가족으로 낙인찍힌 고3 아들이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진상을 밝혀 달라고 하자 문 대통령은 “진실을 밝혀내도록 직접 챙기겠다”고 하고 나서 그 약속을 끝내 지키지 않았다. 국민의 애끓는 호소를 차갑게 외면한 권력, 그것이 지난 일을 오늘로 소환하게 만든 첫 번째 잘못이다.
권력자의 잘못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과 청와대가 진실 공개를 외면하자 가족은 법원으로 달려갔다. 법원이 유족의 손을 들어주자 청와대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항소하는 것도 모자라 핵심 자료를 대통령기록물로 묶어 최장 15년간 공개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당시 해상에서 표류하던 해수부 공무원은 북한군에 억류된 후 6시간 동안 살아 있었다고 한다. 우리 군 당국이 문 전 대통령에게 서면으로 보고한 이후에도 최소한 3시간 생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대통령과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고인이 끝내 북한군에 살해돼 시신이 소각 처리된 직후 TV 화면에 등장한 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건 ‘종전 선언’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사건 직후에라도 고인과 유족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위로의 말이라도 건넸으면, 북을 향해 우리 국민을 무고하게 사살한 데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마디만 했어도, 또 최소한 ‘월북 프레임’이란 누명만 씌우지 않았어도 오늘의 국민적 공분은 좀 덜하지 않았을까.
사건 직후에 북한 김정은이 보낸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친서가 공개되자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국민적 분노가 커지는데도 ‘북한 규탄 결의안’ 대신 ‘종전 선언 촉구 결의안’과 ‘북한 개별관광 허용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해수부 공무원의 월북 의혹에 대한 유엔의 공식 질의에 문재인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근거로 “월북자를 처벌할 수 있다”라고 답변했다는 사실이다.
한교연은 6.25 72주년에 즈음해 발표한 성명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며 “해양수산부 공무원 사건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책무를 게을리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눈치를 살피느라 국민의 안위를 내팽개치고 그 유족에게 억울한 누명의 멍에까지 씌운 부도덕한 이적행위”라고 규탄했다. 이것이 이제라도 감춰진 진실을 속속들이 밝혀내 고인과 가족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결과에 따라 반드시 책임지도록 해야 할 이유다. 그래야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지른 북에도 경종이 된다.
내일은 6.25가 발발한 지 72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쟁의 포성은 멈췄지만, 그 상처는 참전 용사와 그 유가족, 1천만 이산가족의 가슴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참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핵무기를 앞세워 전쟁 준비에 혈안이 된 북한이나 그런 상대에 비위를 맞추느라 국민의 생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던 권력의 그림자는 6.25가 오래 전 지나간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닌 오늘 우리의 현실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