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역사박물관(김종헌 관장)이 18일 오후 1시 서울시 중구 소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아펜젤러와 여성’이라는 주제로 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아펜젤러 순교 120주기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먼저, ‘한국 근대기 여성 이미지의 재현’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소연 교수(이화여대 미술사학)는 “우리 전통 예술에서는 여성을 묘사의 대상으로 삼은 예가 드물어, 조선 후기 풍속화에서 봄나들이에 나서거나 주막에서 음식을 내는 여성의 모습, 대개로는 성리학의 엄격한 잣대에서 예외적 존재로서 보다 자유로운 활동이 묵인되었던 기생과 같은 일부 여성들이 화폭에 담겼다”고 했다.
그러나 “개화기 이후 우리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여성 이미지의 생산과 유통을 경험하게 된다. 기록적, 풍물적 이미지에서부터 배태된 ‘조선풍속화’를 필두로 여성 이미지는 근대 시각문화의 중요한 테마로 부상한다”며 “근대의 심화와 함께 서구와 일본의 미술 개념이 도입되면서 여성 인물화가 사적 영역을 벗어나 전람회라는 공공장소에서 전시되며 우리 근대미술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카테고리를 형성해나가는 과정을 목도할 수도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근대기 식민공간이라는 시공간 내에서 서구인, 재조선 일본인, 조선인이라는 정체성과 시선의 문제, 대상과 주체로서의 남성과 여성이라는 젠더의 문제 등이 점철되면서 여성 이미지의 층위와 그 해석은 복잡다단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20세기 전반 문화계와 미술계의 급격한 변화를 고려할 때, 이미지의 재현방식에 있어 일정한 방향성을 추출해 내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며 “타자로서의 식민지 조선, 그 가운데에서도 최약자로서의 여성의 이미지와 재현으 방식을 고찰하고자 시도한 점에서 의의를 찾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어 ‘아펜젤러, 정동 그리고 여성’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종헌 교수(배재학당역사박물관관장, 배재대 건축학)는 “아펜젤러가 활동하고 있던 정동에는 앙투아네트 손탁(Antoinette Sontag, 1854~1922)이 있었다. 손탁 여사는 왕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아관파천에 가장 강력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특히 손탁호텔을 활동 기반으로 하여 국내외 주요 인사들의 인적 교류를 주선했고, 중요한 외교교섭과 대외의전까지 맡아 활동했다. 즉 공식적인 외교관의 입장이 아닌 여성으로서 오히려 왕실 혹은 황실이 서양 문화를 접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며 “이 밖에도 정동에는 각국에서 온 공사관원들의 부인들과 선교사들의 부인들이 모여 종교 활동을 비롯하여 각종 친목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억압받고 있던 조선 여성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고, 사회적 활동을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고 덧붙였다.
그는 “아펜젤러는 여성이 차별받고 여성의 권익을 증진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며 “아내와 자매와 딸이 교육을 받는 것에 대하여 남학교에서 중요한 토론 주제로 삼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했다.
특히 “아펜젤러가 목포까지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받은 정신 여학교의 어린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군산 어청도 앞 바다에 던졌던 일이 있었다”며 “이처럼 아펜젤러는 당시 한국에서 물건이나 짐승 취급을 받던 여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던 것이다. 아펜젤러가 특별히 여성이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신과 똑같은 인격체로서 생명에 대한 존중과 그의 희생과 헌신을 보여주는 일”이라고 했다.
아울러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받던 여성에 대하여 배제학당이 설립된 지 1년도 안 되어 이화학당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실로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이화학당의 설립과정을 명확히 살펴보는 것은 우리나라 여성학과 여성 운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여성의 권익 신장과 사회적 역할 확대가 최근 현대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130여 년 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이 아펜젤러 등 외국에서 온 서양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고 했다.
이어 ‘「독립신문」을 통해 본 아펜젤러의 여성관’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나미 교수(경희사이버대 후마니타스학)는 “일반적으로 여성운동의 물결을 본격적으로 일게 한 것은 독립협회운동 이후부터이며, 「독립신문」은 여성 교육 문제를 비롯한 남녀 차별 문제를 사회 문제로 제기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립신문」의 국문 발간 취지부터가 남녀·상하·귀천을 불문하고 모든 조선인들에게 각양 물정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또한 여학교 교육에 대한 구체적 방법을 제일 먼저 제시한 것도 「독립신문」이었다. 여성 교육을 시행하여 국가에 유익한 남녀동등권을 획득한다는 여성 교육 사상은 여성들을 크게 각성시켰다고 평가된다”고 했다.
그는 “아펜젤러가 주필을 담당했던 시기의 「독립신문」은 이전 시기에 비해 다소 온건해졌다고 하는 평가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특히 여성과 관련해서는 여학교 신설에 대한 요청을 지속적으로 하는 등 여성문제 해결에 매우 적극적이었다”며 “또한 서재필 재임 시기에 나타났던 첩에 대한 비난 등이 거의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러한 여성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다”고 했다.
더불어 “아펜젤러의 전 생애와 그의 사상, 또한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볼 때, 한국 및 한국 여성에 대한 그의 관심과 성평등을 이루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진심이었으며 또한 확고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앨리스 아펜젤러와 근대 초기 한국 여자대학의 의의’라는 주제로 발제한 강선미 박사(여성학 박사, 하랑젠더트레이닝센터장)는 “앨리스 아펜젤러가 1915년 조선 파견 여선교사로서 내한하여 한국의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했던 1950년까지의 기간은 대부분 한국의 기독교 지식인 여성들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제약을 받으면서도 기독교적 신앙을 통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과 민족과 국가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형성하며 자신의 향학열과 직업 활동 및 사회봉사에 대한 야망을 키워가던 시기였다”고 소개했다.
또한 “앨리스는 이러한 한국 여성들의 교사이자 어머니로서 이들의 요구를 지지하고 함께 해결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요구가 관철될 수 있는 사회변화를 위해 생애 마지막 날까지 헌신하여 특히 한국의 기독교계 여학생들이 개인과 사회에 대해 온전한 자아 인식을 발전시키는 데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존재였다”고 했다.
그는 “엘리스 아펜젤러는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의 기독교 여성 개혁가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여성 고등교육이 여자들을 ‘가사의무에 부적합한 여성’을 만들어 사회 질서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반대론자들의 주장에 맞서, ‘한국여성들이 고유의 여성성을 잃지 않으면서 국가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여성들을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도입하여 , 한국 여성이 국내에서도 고등·전문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있도록 교육 기회와 환경 그리고 내용을 제공했다. 이를 통해 의식과 실력을 갖춘 한국 여성 지식인이 배출되었고, 그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했다.
이어 마지막 발제로 ‘신봉조(辛鳳祚), 여성 교육을 통한 지상천국 건설의 꿈’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고혜령 박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부장, 문화재위원)는 “신봉조 교장은 배재학교에서 교육받고 평생토록 정동제일교회를 섬기고 이화에서 여성 교육의 사명을 다하신 분”이라며 “아펜젤러로부터 시작된 정동교회와 배재학교. 이화학교의 트라이앵글은 근대 우리나라 감리교회 선교의 핵심 고리였다. 그 삼각 고리 안에 존재한 신봉조 선생은 아펜젤러와 여성 선교사들이 닦아 놓은 선교 정신을 이어 한국의 기독교 여성 교육의 뿌리를 내린 인물”이라고 했다.
또한 “신봉조 교장의 이력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화에서의 교장직과 이사장직이다. 이외에도 그는 상명학원, 연세대학교, 새빛학원, 인덕학원, 배재학당 등 여러 학원의 이사 또는 이사장으로서 활동하여 그의 교육 이념을 실현하고자 했다”며 “그리고 강원 홍천에 팔려중고등학교를 세워 농업 교육의 뜻을 이루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신봉조 교장의 교육철학은 인간 중심의 전인교육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며“현대의 중고등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 경쟁 위주로 파행적으로 전개되는 현생을 볼 때, 신봉조 교장의 교육 철학 즉, 여성이 좋은 교육을 받아야 우리나라와 세계가 평화로운 지상 낙원을 이룰 수 있다는 교육철학이 다시 제빛을 발하는 날이 진정한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는 날이 아닐까”라고 했다.
아울러 “이화여중·고는 신봉조 교장 시대에 한국에서 초일류를 달리는 명문 사립고로 성장하여 각계의 여성 지도자를 길러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봉사와 선교의 그리스도인을 배출했다”고 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고, 모든 일정을 마쳤다.
한편,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 기관으로, 고종(1852~1919) 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또 2008년 7월 24일 문을 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1916년 준공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인 정동 배재학당 동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에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가 전인 교육을 실천했던 공간이자 수많은 근대 지식인들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이자 신문화의 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