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모두를 놀라게 한 여전도회연합회의 여성치리권 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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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학회, 제152차 정기학술대회 개최
한국교회사학회 152차 정기학술대회 단체사진. ©한국교회사학회

한국교회사학회(박경수 회장)가 지난 28일 오전 10시 충남 천안 소재 남서울대학교 지식정보관에서 제152차 정기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온·오프라인 동시에 진행됐다.

먼저, ‘4-5세기 니케아적 영성 신학으로 살펴 본 아실(峨室) 나운몽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남성현 박사(감신대)는 “영성신학은 영적인 질병, 즉 사념(邪念)을 치료하는 방법과 체계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는 작업”이라며 “나운몽의 영성이 초대교회 영성과 비교 가능한 이유는 용문산을 중심으로 한 그의 삶과 활동이 개인의 차원에서 보자면 치료라는 관점을 뚜렷하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나운몽이 비록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영성신학의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그가 남긴 24권의 방대한 각종 자료를 통해 영적인 차원의 개인치료를 어느 정도 재구성할 수 있다”며 “그의 회심 과정과 영성운동의 발자취 속에서 니케아적 정통주의 영성신학의 메아리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니케아적 영성신학은 마태복음 5장 8절을 중심으로 하여 정화와 관상 혹은 정화와 사랑이라는 신학적 전통을 세워나갔다. 특히, 영혼의 정화, 즉 영혼의 치유에 관해서 4-5세기 영성신학은 에바그리오스의 팔사념(八邪念)이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십사념(十邪念) 등과 같은 특별한 이론을 정립했다”며 “나운몽의 경우 정통주의적 영성신학의 사념론에 비길만한 체계나 신학적 구조를 견고하게 세우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나운몽의 체험과 영성이 니케아적 영성신학처럼 마태복음 5장 8절위에 자리매김 되어있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아실의 성령운동은 우리나라의 다른 모든 종교운동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며 “덧붙여, 니케아적 영성신학이 영혼의 정화와 마귀와의 싸움을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길로 제시하듯, 아실의 영성 역시 악성을 소멸하고 거짓된 마귀와의 투쟁을 통해 진실 된 생활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령과 통하는 길이라고 가르친다”고 했다.

아울러 “아실의 영성은 4-5세기 니케아적 기독교 영성을 증언해 주는 이 땅의 귀중하고 아름다운 보고(寶庫)”라며 “결론적으로, 나운몽의 용문산 종교운동을 한국적 기독교 혹은 이단시비의 맥락에서만 논의했던 기존의 연구 패러다임을 벗어나 나운몽의 신앙운동이 4-5세기 영성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나운몽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두 번째로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에 나타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상과 정책’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이성진 박사(장신대, 해방교회 부목사)는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종교개혁의 사상과 정책들이 담겨 있는 중요한 문서”라며 “알렉산더 미첼(Alexander F. Mitchell)에 따르면, 「제1치리서」는 그 시대뿐만 아니라 모든 시대의 교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적합한 정치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렇기에 「제1치리서」에 담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상과 정책을 고찰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웃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며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고 했다.

이어 “16세기 스코틀랜드 「제1치리서」에 나타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상과 정책을 살펴보면, 먼저는 역사 속에서 사회적 약자들은 늘 존재해왔다는 사실이며, 둘째로 모든 면에서 현저히 부패한 사회를 복음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라며 “비록 기존의 로마 가톨릭세력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개혁측 세력을 저지하려고 하였지만, 개혁측 세력은 잉글랜드의 도움으로 1560년에 신교를 국교로 만들었고 개혁정치의 근간을 세우기 위해 「제1치리서」를 작성했다”고 덧붙였다.

또 “마지막 셋째로 개혁자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라며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들이 「제1치리서」에서 보여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상과 정책은 분명 성경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이었다”며 “비록 과거에 비해 오늘날은 시대적으로 사회구조나 문화양식이 다르기에 「제1치리서」의 정책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인정하고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우할 것’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사상을 설득하는 것을 넘어서,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사회정책을 바꾸어 나가려고 했던 그들의 열정만을 본받을만 하다”고 했다.

세 번째로 ‘무굴 황제와 예수회 선교사의 문화 종교적 대화:「거룩함의 거울」의 텍스트와 세밀화 분석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제한 김지인 박사(장신대 특별연구원)는 “제롬 하비에르가 「거룩함의 거울」을 저술하게 된 것은 아크바르의 명에 의해서였다. 아크바르 황제는 정복 전쟁을 통해 무굴제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 시켰고, 이후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왕권 강화에 크게 힘썼다”며 “다양한 종교의 신학과 예배형식에 관한 관심을 바탕으로 아크바르는 ‘딘 일라히’(Dīn i-Ilāhī)라는 ‘세계 종교’를 창시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다양한 종교에 관한 관심 중 하나로서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며 “특히 그는 예수가 행했던 많은 기적과 신이자 왕으로서 권위에 관심을 가졌다. 이러한 기독교와 서구 문화에 관한 관심은 이후 그의 아들 자한기르를 거쳐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 황제 때까지도 지속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크바르의 개종을 향한 제롬 선교사의 노력이나, 기독교의 창시자인 예수에 관한 아크바르의 호기심이 만들어낸 이 대화의 기록으로서의 「거룩함의 거울」은 한편으로는 예수회의 적응주의 선교를 위한 노력의 결실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가 어디까지 서로의 문화 혹은 종교를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면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대한 대화의 한계선을 드러내기도 한다”며 “즉, 아크바르 황제는 예수의 기적과 신성 그리고 모세오경의 내용 등에 관해 커다란 관심을 보였지만 예수를 유일한 구세주로서 받아들이거나 기독교의 중요한 핵심 교리였던 삼위일체설을 받아들이고 기독교로 개종할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아울러 “제롬 선교사는 페르시아어를 10여 년 가까이 익히고 코란을 번역하는 등 무굴제국의 언어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거룩함의 거울」이라는 책을 저술함으로써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무조건적으로 무굴의 종교와 문화의 언어로 다가간 것은 아니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비록 코란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구원자로서의 예수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서는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라 여겨 강조했다”며 “이러한 서로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대화의 모습은 오늘날 타문화에 접근하는 선교방식에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최영혜를 중심으로 본 1930년대 함남지역 장로교회 여성들’이라는 주제로 발제한 서선영 박사(장신대)는 “1933년에 있었던 함경남도 여전도회연합회의 여성치리권 청원은 모두를 놀라게 한 큰 사건이었다”며 “이 청원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알린 최영혜라는 인물은 청원이 실패한 뒤에도 수년 동안 신문을 통해 교계의 원로와 논쟁을 벌일 만큼 담대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최영혜의 자료를 수없이 찾으려는 시도를 해도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의 평범함 때문”이라며 “그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했던 인물들 중 많은 이들은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을 가지고 교회 안팎에서 격동의 1920년을 보내면서 함경남도 장로교회여성들의 지도자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결국 1백 명이 넘는 교회 여성들을 규합하여 여성들에게 치리권을 달라고 총회에 청원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아직 여성참정권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때, 조선에 수많은 여성들이 교회를 섬기고 있으면서도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함경남도 장로교회의 여성들은 해냈다”며 “이들의 결속력, 추진력, 조화로움을 함경남도 여성들 특유의 독립성과 개방성으로부터 찾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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