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자로서 부부가 이혼의 위기에서 벗어나 행복한 부부로 변모한 요인을 아래와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그들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 되길 바랬다. 그래서 순간순간 변하기 쉬운 감정이라는 놈의 노예가 되지 않고 대신 생각을 정확하게 하기로 결심했다.
둘째, 그들은 자기 자신과 소통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그 생각이 정말 맞는지 따져보았다.
셋째, 그들은 결혼이 과연 무엇인지? 부부관계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그들이 궁금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자기 인생이 행복하길 바랬기 때문이다.
넷째, 그들은 정말 행복하기 위해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잘 소통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삼았다.
다섯째, 그들은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의 힘 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았다.
오늘은 "셋째, 그들은 결혼이 과연 무엇인지? 부부관계란 본질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그들이 궁금해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자기 인생이 행복하길 바랬기 때문이다"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결혼이란 두 남녀가 남남으로 살다가 만나 "부모를 떠나... 두 사람이 한 몸이" (창2:24부분) 되는 일이다. 모르는 남녀가 같이 살게 되는 일이다. 이 얼마나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인가? 남으로 살던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순간 낭만이라는 신비감을 느낀다. 낭만의 신비스러움은 단연 일생일대의 최고 특별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짜릿한 연애를 경험해 본 사람은 잘 안다(물론 경험하지 못해본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녀가 서로 너무 좋아서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마음이 들 정도가 되면 '우리 이제 같이 살자!'의 합의에 이르는 일이 결혼이다. 부모랑 살던 인생이 배우자와 사는 인생으로 전환하는 순간이다(마음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부부가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다).
결혼의 본질적 의미가 여기에 연결된다. 한 사람이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배우자와 같은 사람은 없다. 가장 가까운 인생 동반자다. 배우자는 '우리'이지만 동시에 '나'다. 한 인생이 다른 인생과 만나 서로에게 소속되는 동시에 하나가 되어 '나'를 확인하게 해준다.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일인가?
부부관계가 이렇게 둘도 없는 특별한 관계를 누리도록 해주는 최고의 관계다. 하지만 그만큼의 갈등이 예상된다. 부부가 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지만 나쁠 때도 있다는 것! 사랑하지만 미울 때도 있다. 신비롭지만 권태로울 때도 있다. 편하지만 불편할 때도 있다. 친하지만 낯설 때도 있다. 아는 것 같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영원히 같이 살자고 했지만 떨어져 지내고 싶을 때도 있다. 희생적이지만 이기적일 때도 있다. 왜? 도대체 왜?? 사랑한다고 결혼해 놓고 원수처럼 각을 세우는가?
학자들이 연구한 자료들을 따져보아도 근본적으로 이유는 하나로 귀결된다. 사람이니까! 신이 아니니까! 이 결론을 인정하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쉽게 말해보자.
사람은 온 몸에 가시 돋친 고슴도치와 같다. 보이지 않는 가시가 있어서 타인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오면 부지 중에 찌른다. 서로 너무 가까우면 찌르고 찔린다. 가까이 지내고는 싶은데 그러려면 찌르고 찔리는 일을 각오해야 한다.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 말자. 가깝다고 언제나 날 잘 이해해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자.
'난 타인으로부터 절대 미움 받을 이유가 없어!'라는 착각은 버리자.
'누구도 나에게 불이익을 주지 못해!'라는 순진한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말자.
당신도 사람이다.
타인도 사람이다.
'저 사람이 나한테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 것은 날 업신여기기 때문이야!' 같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자신을 속이지 말자.
'저 사람이 나한테 인사도 안 해. 날 깔보기 때문이야!' 같은 자기연민에 빠지지 말자.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는 이상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어렵다. 그저 어린 아이가 '날 좀 알아봐줘. 날 좀 인정해줘. 이거 해줘. 저거 해줘.' 떼쓰는 일만 할 뿐이다.
결혼 전 상담에서 빼놓지 않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한 사례를 소개한다.
"결혼해서 행복하길 바래요?" 라고 예비부부에게 물었다.
"그럼요!"라고 예비부부가 답했다.
"그럼 두 분이 결혼 전에 미리 행복할 준비를 갖추어야 해요."
"어떻게 준비하면 되나요?"
이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을 했다.
"두 분은 독립적인가요? 아니면 의존적인가요? 타인 의존적인 사람은 배우자를 사랑 자판기 정도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부관계 문제로 찾아오는 대부분의 부부들은 이 문제에 걸려 있어요. 독립적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지요."
"독립적 사랑이 뭔가요?"
"본래 부부는 독립적 인격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혼을 상대방의 사랑을 추출해 내는 '사랑 공장' 정도로 생각하면 서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아,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너무 기대려는 마음을 버리라는 말씀이군요."
"예. 반 정도 맞아요. 독립적 사랑이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잘 받아들이는 것에서 출발해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아 나의 이 부분은 마음에 들어'하는 부분과 '마음에 안 들어.'하는 부분 모두를 다 그대로 자기 자신이라고 받아드리는 거에요. 그래야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어요. 그래야 상대방에게 사랑을 구걸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구걸한다고요?"
"예, 부부상담을 하다 보면 '이 사람 때문에'라는 말이 레퍼토리에요. 예외가 없어요. '이 사람 때문에' 레퍼토리는 결국 '이 사람이 내가 원하는 만큼 날 사랑해주지 않아요'라는 뜻이지요. 사랑을 구걸한다 게 이런 겁니다."
"저희는 그렇게 하지 않도록 준비를 잘 할게요."
"너무 장담하지 마세요. 사랑을 구걸하는 일은 부지 중에 실수로 하게 될 때가 많으니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슴도치의 가시가 나 있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찌른다. 부부관계는 더 그렇다. 누구보다 가깝기 때문이다. 팩트다. 팩트를 받아들여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 그래야 더 잘 사랑할 수 있다.
그럼 왜 결혼이라는 게 존재할까? 하나님은 왜 결혼 제도를 만들었을까? 지지고 볶고 싸우고 이혼할 결혼을 왜 하게 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결혼할 때가 결혼 안 할 때보다 더 기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바라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무런 스트레스가 없는 인생인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 만일 가능하다 해도 스트레스가 없는 인생보다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있는 편이 우울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쉬운 예로, 배고픈 게 없다면 식사가 즐겁겠는가?
만약 당신에게 사랑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당신은 무슨 낙으로 이 세상을 살겠는가? 싸워서 밉기도 하지만 사랑할 수 있는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말 안 듣고 말썽부리는 자식이지만 사랑할 그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와 희망이 되는가? 우울은 다른 게 아니다. 삶에 희망을 느끼지 못하는 게 우울이다.
때론 지옥같이 고통을 주는 가정이라도 없다면 인류는 이미 스스로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사랑이 좋은 만큼 사랑하지 않는 고통도 존재한다. 마치 봄과 여름에 푸른 초목이 무성하다가 가을에 지고 겨울에 앙상하면, 다시 푸르른 봄의 초원을 그리워하듯 말이다. 사랑하지 않아 고통을 느낄 때 우리가 다시 사랑을 그리워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한 축복이다.
다만, 사랑이 권태로워 새로운 사랑을 찾을 때를 주의하자. 사랑을 배반하지 않는 것만 하면 된다. 정말 행복하고 싶은가? 사랑의 권태를 인내하라. 자동으로 사랑을 느낄 때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사랑은 억지로라도 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사랑할 때만 사랑하는 것은 사탕을 찾는 초등생 이하의 유치한 기호일 뿐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다.
권태로워질 때 당신의 소중한 배우자를 향해 이렇게 독백해보라.
"사랑아, 내 사랑아, 너는 나의 어여쁜 내 사랑이라!"
혹 배우자가 당신을 배반했다면 이렇게 독백해보라.
"미련한 자여! 정신 차리라! 너는 소중한 복을 차버리려는구나! 나는 너의 복이라. 더 늦기 전에 돌아오라. 그렇지 않으면 기회가 없으리라!"
정우현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상담학)
#정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