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이 서양이나 이스라엘의 고유한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려고 이 땅에 직접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오셔서 행한 일의 결과를 내 자신의 삶에 체험적으로 적용 실천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시려면 어느 민족이든 택해야 했고 그래서 유대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한국에 오시기로 택했다면 구약 성경의 모든 배경과 그 이야기는 한국 땅에서 동일한 모습으로 이뤄졌을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자력으로는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 절대 하늘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생각해볼 측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되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그와 동시에 이 딴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사셔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름, 우리처럼 평범한 이름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요셉과 마리아 유대인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보통의 경우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는데 반해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현몽하여 지어준 이름이 예수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신령하거나 지금껏 세상에 없던 특이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후계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지도자 여호수아와 똑같은데 예수는 그 헬라식 이름입니다.
유대 사회에선 여호수아는 아주 흔한 이름입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신체 구조와 인간적 특성을 지녔던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슬픔을 함께 겪었고 죄를 짓지 않았지만 시험과 유혹을 동일하게 받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여호수아와 구별하기 위해 출신지역을 붙여서 ‘나사렛 예수’, 또는 메시아라는 별칭을 붙여 ‘그리스도 예수’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에는 그런 구별법보다 더 확실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출생하기 전 구약시대에서 여호수아는 ‘죄에서 구원하시는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 받을 것을 소망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예수님의 이름을 작명해주면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1:21)라고 했습니다. 구약 내내 가졌던 사람들의 소망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죄를 사해주시는 여호와가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여호와가 죄에서 구원해준 자기 백성이 이스라엘 사람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알다시피 아브라함의 후손, 그것도 야곱의 열두 아들이 선조가 된 12지파로 이뤄집니다.
창세기 4장은 가인의 후예들이 일부다처제를 시작했고 그것도 여인들을 무력으로 탈취했을 만큼 살인을 예사로 저지르는 등 죄악이 걷잡을 수 없는 모습으로 확장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와중에도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의 씨앗을 예비해놓습니다. 아담에게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할 셋을 주었습니다. 그 아들 에노스로 인해 셋 계열의 경건한 사람들의 후예가 늘어나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창4:26)
모세에게처럼 하나님이 그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거나 그들 스스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에 죄악은 들끓고 있고 인생이 너무 허망해져서 절대자 하나님 제발 저희를 이대로 버려두지 말아달라고 구원을 갈망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인식은 못했어도 장차 메시아가 여호수아라는 이름으로 오실 것이라고 성령이 계시해준 셈입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든 그리스도 예수든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아셔야 합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스스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에게 가장 크고도 최후의 문제인 죄에서 구원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나를 개인적으로 찾아와 만나 주시고 죄에서 씻어서 당신의 자녀를 삼아주셨고 지금도 항상 함께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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