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장차남 목사(증경총회장, 온천제일교회 원로)가 ‘지로적 신학자 박형룡과 그의 신학교육’이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장 목사는 “박형룡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교육자이다. 그리고 그의 평생을 신학교 교수로 제직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1928년 평양신학교 임시교수로 시작하여 1932년 남궁혁, 이성휘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 전임교수가 되었고 1938년 신사참배를 반대한 평양신학교가 자진 폐교하기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며 “그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총회 표준성경주석위원회편집책임자의 일을 전담하다가 1942년 만주국 봉천에 세워진 만주신학원에 가서 교수했고 1945년 해방을 맞아 학교 이름을 동북신학교로 개명하여 교장겸 교수로서 학교를 이끌었다”고 했다.
또한“국내에선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설립되는 부산의 고려신학교 초대 교장으로 박형룡을 내정하였으나 그의 귀국이 늦어지자 박윤선을 교장서리로 개교한 후, 송상석 목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만주까지 가서 박형룡과 그 가족들을 모셔와 1947년 제1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였지만 설립자 측과의 입장 차이로 이듬해에 사임하고 상경하였다”며 “1948년 서울을 중심으로 그를 염두에 두고 설립된 장로회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교수하였고, 1951년 총회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직영승인을 다 취소하고 두 신학교를 총회직영으로 신설되는 총회신학교에 병합하라고 결정함에 따라 조선신학교는 불복하였으나 장로회신학교는 순복하여 총회신학교 안에 들어오게 되고 빅형룡은 총회신학교 교수로 그 후 두 번의 교장재임과 대학인가 후 다시 학장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교수직에서 퇴임하기까지 40년 을 오로지 목사양성과 강의하는 일에 정진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후 1978년 별세하기 전날 밤 11시까지 그는 저작전집 원고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며 이튿날 아침에 깨어나시지 않았다고 한다. 박순도 사모님의 증언과 밤 9시까지 출판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다는 출판위원장 정문호 목사의 증언이어서 그의 복된 죽음에 정말 감동”이라고 했다.
그는 “미국유학을 마치고 1927년 7월 쯤 귀국한 박형룡은 8월부터 12월까지 신의주제일교회 전도사로, 1928년 1월부터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고, 1929년 5월 5일에 평양노회에서 목사로 장립하여 1930년 8월까지 산정현교회 동사목사로 시무하였으며 숭실중학교 성경교사 봉직 및 숭실대학과 평양신학교에 출강하였다”며 “그러므로 그의 교회시무는 목사로 안수받기까지와 동사목사로 1년여 협력한게 전부이되 그것도 몇 학교에 출강하면서였고, 그 이후로는 오로지 신학교육자로서 평생 교수로 재직하며 강의와 연구에 힘쓰되 때로는 교장직을 맡아 교육행정 면에도 기여했다”고 했다.
이어 “박형룡의 신학교육은 그가 1928년에 평양신학교 임시교수로 강의를 시작하여 1931년에 정교수로 취임하였고, 그후 1972년 2월에 신학교단을 떠나기까지 무려 40년을 후학지도와 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평양신학교, 만주신학원, 동북신학교, 고려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총회신학교 등에서 교수하며 때로는 교장의 책임을 지고 학교를 운영하였다”며 “그러므로 그의 한 평생은 오로지 목회자 양성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므로 그 동안 한국 장로교회 태반의 지도자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었다. 아마도 제자 양성과 신학교육 봉사에 박 박사님 이상 가는 공헌자는 없을 것이다. 그의 양육을 받은 제자들이 한국 장로교회를 오늘날 이만큼 일으켰으니 박 박사의 칼빈주의 개혁신학 정통로선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장 목사는 “한 때 총신에서 박형룡과 동역했던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총장 한철하 박사는 ‘한국기독교 100년사 중 후기반세기 동안에 1천2백만 신도 수만 교회를 이룬 것에 대하여 ‘그 가장 큰 공로를 박형룡 박사에게 돌려야 한다. 그분이 보수신학을 한국교회에 확실하게 세워주지 않았다면 사실 한국교회가 오늘의 한국 교회가 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모든 면에 흠잡을데가 없는 건실한 신학을 세워주신 일에 대하여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했다.
아울러 “그것은 박형룡이 한국교회의 지로적 신학수립과 수많은 목자양성으로 이 땅의 교회를 바로 세우고 지키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앞으로도 그 영향이 계속 뻗어 갈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 발제를 맡은 문병호 교수(총신대신대원 조직신학)는 ‘죽산 박형룡 기독론의 요체: 중보자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과 그의 의의 전가’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문 교수는 “죽산 박형룡에 대한 고찰은 다각도로 이루어져 왔다. 죽산의 사후 한동안 그의 삶과 그가 한국 개혁주의 보수신학에 미친 영향을 전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다룬 글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그가 전개한 조직신학 교리 조목 개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고 했다.
이어 “‘칼빈(John Calvin)-녹스(John Knox)-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죽산 박형룡’의 맥이 한국 장로교 보수신학의 대계(大系)라고 여겨진다”며 “죽산은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가 교리적으로는 대륙의 개혁신학, 삶으로는 영미의 청교도신학에 서있음을 자신의 여러 저술을 통하여 누차 술회하고, 이를 ‘청교도 개혁주의’라고 불렀다. 이러한 죽산의 신학이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의 정통 신학과 개혁교회의 정통 신경에 맥이 닿아 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죽산의 신학에 대한 평가에는 명암이 엇갈린다”며 “대체로 그의 신학을 계승하는 측에서는 그 정통성과 함께 고유성을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반면, 그의 신학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피력하는 측에서는 그의 저술이 이전 신학자들의 글들을 옮겨 놓은 모사에 불과하다거나 그의 신학이 근본주의의 오류에 빠져 편협함을 드러낸다거나 하면서 비판의 날을 세운다”고 했다.
그러나 “죽산이 한국 신학계에 조직신학자로서의 최초의 족적을 남겼음을 부인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산의 신학은 꽃꽂이 신학 혹은 꽃밭(庭園) 신학으로 칭해지기도 한다”며 “이는 그가 유수한 당대의 신학을 단지 목차별로 정리하는데 머물렀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주목하듯이, 죽산의 신학에는 영미와 화란의 개혁신학 단지 인용만 하지 않고 자기의 신학으로 적절하게 용해해서 한국교회에 전한 모종의 ‘독창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다.
이어 “죽산은 칼빈 이후 개혁신학자들이 추구해 온, 신학서론-신론-인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의 ‘종합적-체계적 방법’에 따라서 조직신학 전권을 저술하였다”며 “그리고 주요한 교리 조목들에 대한 변증을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이는 한국 기독교사에 획을 긋는 업적이며, 무엇보다 한국 장로교 보수신학계의 일대 쾌거가 아닐 수 없다”고 덧붙였다.
또한 “죽산의 「기독론」은 크게 네 편으로 구성된다. 제1편 ‘그리스도의 품위’에서는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을, 제2편 ‘그리스도의 신분’에서는 비하와 승귀의 상태를, 제3편 ‘중보의 삼직’에서는 선지직, 제사직, 왕직을, 제4편 ‘그리스도의 속죄’에서는 객관적·직접적 전가설의 속죄론에 할애된다”며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은 기독론을 전개하면서 구속언약(구원협약)과 은혜언약을 제일 앞자리에서 함께 다루는 것이 상례인데, 죽산은 이 부분을 「인죄론」의 마지막에 할애함이 독특하다. 이는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상관성을 부각시키려 했음이 분명하다”고 했다.
문 교수는 “죽산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과 그에 따른 속성교통, 그 가운데서의 의의 성취, 그리고 그 의의 전가를 창세 전 구속언약(구원협약)의 역사적 성취 경륜으로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이라고 보는 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으며, 이는 개혁신학의 정통적 입장에 부합함을 보았다”고 했다.
이어 “개혁신학은 칭의와 성화가 모두 은혜라는 이중적 은혜(gratia duplex) 교리에 서 있다. 성화 과정의 성도의 선행을 강조하되, 그것조차 그리스도의 다 이루신 의의 전가에 따른 은혜의 열매로 본다”며 “그리하여 상급도 은혜라는 어거스틴(Augustinus)의 입장이 견지된다. 동일한 맥락에서 죽산은 성도의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unio mystica cum Christo)을 칭의와 구별하되 칭의와 다를 바 없이 법정적 관점에서 고찰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죽산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이 중보자 그리스도의 위격에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과도 다르고, 단지 윤리적(공로적)이거나 심리적인 연합과도 다른, 오직 은혜로, 영적으로, 주어지는 고유한 것임을 분명히 변증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죽산이 신학을 배우고 가르치던 시기는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내재주의와 리츨(Albert Ritschl)의 윤리주의가 점차 퇴색하고 바르트(Karl Barth)와 브룬너(Emil Brunner) 등을 필두로 신정통주의 신학이 맹위를 떨치던 때였다”며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따르면, 성경 말씀은 그 자체로는 계시가 아니라 계시의 자료에 불과하고, 실존적 부딪힘을 통하여 ‘유의미성(Bedeutsamkeit)’을 지니게 될 때, 비로소 계시가 ‘된다(werden).’ 이렇게 본다”며 “성경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아니라, 사람 혹은 교회에 의해서 해석되어 정황적 의미를 드러내는 소여(所與)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러한 의미를 계시로 보는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슐라이어마허에 헤겔(G. W. Friedrich Hegel)을 채색하여 ‘주관적 관념주의(subjective idealism)’ 혹은 ‘관념적 주관주의(idealistic subjectivism)’의 극단을 노정시킨다”고 했다.
이어 “바르트는 자신이 ‘계시’를 신학에서 되찾았다며 정통성을 운운하는데, 실상 그의 신학 방식은 ‘성경의 유비(analogia fidei)’가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에 전향되어 있는바, 오직 ‘성경의 것’만을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칼빈과 그를 잇는 개혁신학자들과는 철저히 대척점에 서 있다”며 “바르트는 ‘성경의 것’이 아니라 ‘성경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성경적인 것’이라고 보는바, 계시를 성경 말씀 자체가 아니라 그 말씀이 독자에게 부딪히는 의미와 동일시한다. 의미를 생성하는 이러한 부딪힘은 ‘계시사건(Offenbarungsereignis)’이라고 칭해지는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아들이 되신 분으로 기술되는 성육신이 그 최초 사건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이 사건이 사람들에게 전형 혹은 모범으로서 제시된다는 점에서 예수는 구원자가 된다고 여긴다. 여기에는 정통 기독론의 위격적 연합 교리와 그가 다 이루신 의의 언약적 전가가 무색해진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죽산은 중보자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어서의 신인양성의 위격적 연합, 그 두 본성의 속성교통, 그 가운데 다 이루신 대속의 의, 그 의의 전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엄정한 교리로 수립하고 그 참됨을 언약신학의 구속사·구원론적 관점을 견지하며 분명하게 변호하고 있다”며 “죽산이 전개한 기독론의 요체가 여기에 있으니, 죽산 역시 개혁신학자들의 정통적 입장에 선 조직신학자로서 교훈적-변증적(didacticapologetic) 책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정승원 교수(총신대신대원 조직신학)가 ‘죽산 박형룡과 능동적 순종’, 강웅산 교수(총신대신대원 조직신학)가 ‘죽산 박형룡의 회심론 연구: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신학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