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로마 가톨릭 시대부터 지금까지 대부분의 전도는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것을 신 존재증명(proof of existence of a god)이라 한다. 기독교인 대부분은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면 믿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해서 믿음을 갖게 되는 일은 거의 없다. 설혹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굳이 기독교인이 될 당위성은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
그러므로 20세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기독교 변증학자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는 전도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 이유를 “인간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기억 속에서 하나님을 떨쳐버리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1).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감지할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는 감지하지만 애써 떨쳐버리려 애쓰는 존재라는 말이다. 이런 사실을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 1:19)는 말씀으로 잘 논증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어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믿지 못한다. 신관(view of God)에 대한 왜곡이 하나님을 믿는데 장애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아버지를 세상에 바르게 계시하여 죄인들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코넬리우스 반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변증학에 있어서 전반적인 논쟁이 단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무엇인가 막연한 것을 다루는 무의미한 토론 이상의 것이 되어 구체적으로 어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가를 다루는 것이 되려 하면, 이 문제를 다룸에 있어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이야기가 함께 거론돼야 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2)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자연인들에게 증거되고 수용될 때, 비로소 세계관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이 바울에게서 그대로 입증된다. 바울은 처음부터 유대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하나님(왜곡된 하나님)께 열심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문제는 유대인들의 문제점처럼 하나님을 믿지만 “올바른 지식을 따르는 것이 아니”(롬 10:2)었다는 점이다. 신관이 왜곡됐기 때문에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이었고, 세상과 구별됨이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통해,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게 되자 세계관이 변하게 되었다. 사도행전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행 9:18) 되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완전히 다른 안목, 다시 말해서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됐다. 그에게 이런 급진적인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많은 성경공부가 아니었다. 핵심은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바로 이해하게 된 데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조명에 의해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올바른 세계관의 유일한 전제가 되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요(요 14:9),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계시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성령의 조명은 필수적이다. 성령이 아니면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전 12:3). 성령님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도록 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 세계관의 변화는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은 하와가 뱀의 유혹으로 하나님께 대한 이해가 왜곡되자 세상을 보는 세계관이 변질됐던 원리와 그대로 짝을 이룬다.
하나(一)와 전체(多)의 문제
이렇게 성자 예수님을 통해, 성령 하나님의 조명에 의해 하나님께 대한 올바른 지식을 소유한 사람은 세계관 전체에 변화를 경험한다. 종교적 영역의 안목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과 가정 등의 ‘모든 영역’에 대한 안목의 변화를 동반한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하나와 전체의 문제’, 혹은 ‘일(一)과 다(多)의 문제’라고 한다. 하나와 전체의 문제란, 이 세상 ‘전체’를 해석하는 ‘하나’란 무엇인가의 문제다. 쉽게 말한다면 돈, 명예, 성공, 행복, 인생의 의미 등에 대해 통일된 해답을 줄 수 있는 ‘하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관념론, 유물론, 유신론이라는 전체를 해석하는 ‘하나’에 대한 주장이 나오게 된다.
관념론은 관념(觀念/생각)이라는 ‘하나’에 의해 온 세상이라는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다고 믿는 세계관이다. 이렇게 관념론에 심취한 사람들은 세상 모든 것을 관념(생각)의 결과로 해석한다. 모든 문명, 물질, 제도, 사람, 종교까지도 다 관념(생각)의 결과로 본다. 원효대사에 대한 일화는 관념론자의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보여준다.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을 가던 중에 무덤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근처 있는 물을 달콤하게 마셨는데 일어나 보았더니,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토할 뻔했다. 이 사건에서 원효대사는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즉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깨닫게 된다. 이렇게 관념론자들은 세상 ‘전체’를 관념(생각)이라는 ‘하나’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유물론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부한다. 그들은 물질이라는 ‘하나’로 온 세상 ‘전체’를 일관성 있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각하는 사람(물질) 없이 생각이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이 세상 모든 것들(전체)은 물질(하나)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한다. 마음도 종교도 물질이라는 그릇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라는 감정도 결국 호르몬이라는 물질의 결과일 뿐이다. 종교도 인간이라는 물질들이 고안해낸 공통관념, 혹은 ‘추상’이라고 한다.3) 유물론자들은 이렇게 물질이라는 ‘하나’로 세상 ‘전체’를 해석하는 세계관을 갖는다.
이런 두 가지 태도에 대해 유신론(唯神論)은 신(God)이야말로 ‘전체’를 해석하는 ‘하나’라고 주장한다. 관념과 물질을 비롯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God)의 창조 없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유신론자들은 ‘신’이라는 ‘하나’를 전제로 하여 세상 ‘전체’를 해석하는 세계관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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