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해외선교회(GMF) 대표 권성찬 선교사가 6일 복음과도시 홈페이지에 ‘복음은 왜 번역 가능한가”라는 주제로 글을 올렸다.
권 선교사는 “기독교는 번역 가능하다. 이는 이미 합의된 선언이다. 이에 대해 주로 언급한 학자는 대표적으로 감비아 출신으로 예일 신학부에서 가르친 라민 사네(Lamin Sanneh), 에든버러 출신의 교회역사학자 앤드류 월스(Andrew Walls), 그리고 가나의 크와메 베디아코(Kwame Bediako) 등”이라고 했다.
이어 “타문화에서 성경을 번역하는 선교사들은 번역가능성(translatability)을 누구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동의하고 실감한다. 만일 기독교의 복음이 번역가능하지 않다면 다른 언어, 다른 문화로 복음을 옮겨내는 일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심지어 신성모독이 될 것”이라며 “성경 번역은 기독교의 고유한 표식(vintage mark)인 반면에 이슬람에서는 아랍어 코란의 번역불가능성이 그 종교의 특징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두 종교가 선교와 다원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에 중요한 함의를 가지며 개종의 성격과 목적에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번역가능한 종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며 “라민 사네는 세 가지로 이 주장을 변증한다. 첫째, 기독교는 창시자인 예수님이 사용하신 언어로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둘째, 기독교는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장소를 별로 기억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기독교는 창시자의 언어로 예배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더 나아가 사람들의 일상 언어로 예배한다는 점”이라고 했다.
또 “라민 사네의 설명이 기독교의 번역가능성에 대한 묘사(descriptive)라면, 앤드류 월스는 좀 더 원리적으로 접근한다. 월스의 설명에 따르면 기독교의 번역가능성은 성육신에 기반한다”며 “영원하신 말씀이 인간으로 번역 곧 성육신되었기에 기독교 성경은 번역이 가능하다. 이슬람은 코란을 영원한 말씀으로 이해하기에 번역할 수 없으며 그에 상응하는 기독교의 말씀은 영원한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성경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지만 성육신했다는 면에서 번역된 말씀(Word translated)이다. 그 번역된 말씀인 그리스도에 의존하고 있는 성경은 그래서 번역가능하며 또 번역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며 동시에 번역된 말씀이라는 월스의 설명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두 가지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말씀이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 곧 하나님이시다(요1:1). 동시에 그는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민족의 한 사람으로 특정한 지역에 나신 번역된 말씀이다. 복음의 번역가능성은 후자를 기반으로 발전시킨 기독교의 특성”이라며 “말씀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고, 그 태초부터 존재하셨던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요일1:1)라고 성경은 증언한다”고 했다.
이어 “번역가능성의 논의에서 놓치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 바로 영원한 말씀이라는 그리스도의 속성”이라며 “사실 번역된 말씀이 가능한 이유는 영원한 말씀이라는 속성 때문이다. 영원한 말씀은 번역된 말씀보다 우선성을 가지고 있고 번역된 말씀에 대한 근거이다. 따라서 복음의 번역가능성은 복음의 영원성을 담보한 상황에서만 유효한데, 그것이 번역가능성의 목적을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권 선교사는 “복음의 번역가능성으로 인해 다양한 언어, 다양한 문화를 동등하게 대한다는 입장이 정당성을 확보하며 따라서 번역가능성은 위의 학자들이 언급한대로 언어 속으로, 문화 속으로 깊이 나아가는 면이 강조되었다”며 “특별히 오늘날은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북반구의 종교라는 인식을 벗어나 다양한 나라와 지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며, 다른 어느 때보다 기독교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현재의 다양한 지역이라는 공시적 관점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다양한 세대라는 통시적 관점에 적용하면, 현재 기독교의 쇠퇴를 역전시킬 요소의 하나로 번역가능성을 언급한 팀 켈러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했다.
이어 “다만 번역가능성에 대해 복음이 다양한 문화 혹은 세대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원심적인 면만 묘사하거나 주장하는 것은 비록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하지 않은 설명이다. 왜 번역을 허락하는가? 다른 말로 왜 형식을 여는가”라며 “이에 대한 이해와 전제에 기반하지 않고 단순히 번역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은 미래에 축소와 왜곡을 가져올 가능성이 많으며 실제로 역사가 그것을 증언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원을 이루는 기독교 문화, 기독교 형식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화, 형식 혹은 심지어 민족(이스라엘)이라도 그것이 본질을 독점하는 순간 축소와 왜곡과 타락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며 “유대인을 향한 예수님의 논쟁과 지적은 율법뿐만이 아니라 선택된 민족이라는 형식으로 본질을 대체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화와 형식과 더 나아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을 열어 놓으신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떠한 형식에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본질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복음은 번역가능성이라는 한 면과 더불어 더 중요한 면인 본질 유지를 포함할 수 있는 용어로 ‘번역성’(translativity)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고 했다.
또한 “기독교는 번역성의 특질을 가졌는데, 이는 끝까지 본질을 유지해야 하는 변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우선성에 모든 문화와 세대와 다양성 속으로 침투해야 할 번역가능성을 더해 이루어진 특질”이라며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으며 어느 것도 독점할 수 없기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복음을 번역함으로써 영원한 것은 영원한 대로 그리고 함께하는 것은 함께하는 대로 두 가지를 모두 놓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이방인에게, 새로운 문화에게, 새로운 세대에게 특정한 형식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았다는 말을 그들에게 맞는 형식을 주었다는 말로 변환하는 순간 오류가 일어난다. 그리스도의 영원성, 즉 복음을 알게 된 사람에게 특정 형식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지, 새로운 형식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라며 “전환기이자 그래서 반추의 시대인 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깊이 묵상할 것은 새로운 지역에, 문화에, 세대에게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라는 형식에 대한 반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원성에 대한 묵상, 복음의 본질에 대한 묵상이다. 본질을 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와 세대와 더불어 함께할 때 새로운 형식을 그 문화가 그리고 그 세대가 자신에게 맞도록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작금의 문제는 새로운 방식을 찾지 못해서라기보다는 본질을 상실한 채 다가가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과 가진 마지막 만남에서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한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사랑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있어야 모든 사람이 그들이 주님의 제자임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셨다(요 13:34-35). 그 사랑의 큰 그림은 주님의 기도에서 드러난다.(요 17:21)”고 덧붙였다.
아울러 “그리스도를 통해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 되는 공동체가 서로 서로 하나 되는 공동체가 되고, 그 공동체가 세상에 나가 함께할 때, 새로운 문화에 함께 할 때, 새로운 세대에 함께할 때 하나님과 하나 된 속성과 서로 하나 된 속성으로 인해 그들이 주님을 믿고 그 하나 됨 안으로 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는다”며 “변하지 않는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묵상하고 그를 근거로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세대에게 끝없이 변하는 모습으로 다가가는 그런 복음의 공동체의 출현을 고대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