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윤리학회(오성현 회장)가 최근 서울신학대학교(황덕형 총장, 서울신대)에서 ‘기독교윤리학자들이 바라본 메리토크라시”라는 주제로 2022 봄 정기학술대회가 개최됐다. 이날 행사는 온·오프라인 동시에 진행됐다.
‘기독교사회윤리 관점에서 본 능력사회 논의’라는 제목으로 강연한 조용훈 교수(한남대)는 “지금 우리사회에는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정부 인사청문회 때마다 입시부정과 병역특혜는 쟁점 중에 쟁점”이라고 했다.
이어 “능력주의란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보상해야 한다는 사회시스템이며 이데올로기다. 능력주의가 근대사회에 등장할 때만 해도 전근대적 세습과 특권을 타파하고, 혈통이 아닌 능력에 따른 사회적 계층이동을 보장한다고 여겨 열렬히 환영받았다”며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성공한 엘리트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세습사회가 등장하고 있다. 능력주의가 불평등 분배를 정당화하고, 기득권 세력의 특권을 대물림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해가고 있다. 우리사회는 물론 전 세계 곳곳에서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이 각종 통계들 속에 드러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능력주의 사회의 특징은 먼저, 학력평가에 기초하여 대학과 직업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차등 배분하는 학력사회”라며 “공부를 잘 한 사람이 유능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기업이든 정부든 명문대 출신을 선호한다. 문제는 학력이 절대화되면서 교육 자체가 입시교육으로 전락하고, 성공한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학벌이 만들어지면서 또 다른 특혜나 차별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둘째로 성과와 업적에 따라 보상하는 성과사회 혹은 업적사회로 발전한다”며 “프로 스포츠 세계에서 보듯이, 성과는 연봉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한다. 성과사회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성과를 내기위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은 물론 과거의 자신과 비교하면서 무한경쟁의 덫에 빠진다. 세계화 경제 속에서 경쟁이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되면서 훨씬 더 어렵고 잔인한 경쟁으로 내몰린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로 테크노크라트 엘리트가 추축이 된 새로운 귀족사회를 만든다”며 “전통 귀족사회가 혈통에 따른 귀족통치였다면, 능력주의 사회는 전문기술 관료인 테크노크라트들이 지배하는 엘리트사회다. 사람들은 고도의 지적 훈련과 전문기술을 지닌 각 분야의 엘리트들이야말로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사회문제나 정치 이슈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런 기대를 반영하여 국가 통치자들은 자신의 정부가 명문대 출신의 유능한 엘리트 관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강조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능력주의 사회에 재등장하는 은밀한 형태의 세습이다. 전근대 세습사회가 혈통에 따른 노골적인 세습이었다면, 능력주의 사회의 세습은 은폐된 방식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은밀한 세습의 방편 가운데 하나가 학력”이라며 “부모의 문화적자본은 학력을 통해 합법적으로 자녀에게 세습된다. 과거 귀족의 특권이 ‘타고나는 것’(출생)이었다면, 현대 엘리트의 특권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공한 부모들은 자신들이 지닌 부와 사회관계망이라는 자본을 어려서부터 자녀교육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여 엘리트를 만들어 낸다. 말하자면, 교육투자는 과거의 사후 상속 방식과는 다른 생전 상속이라 할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부와 지위의 대물림 이슈는 ‘수저계급론’ 형태로 표출되었다”고 했다.
조 교수는 “능력주의 이념은 전근대의 신분주의를 타파하면서 능력과 노력에 따른 기회평등의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런데 이 약속은 마치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완전경쟁 이념처럼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다. 한 인간의 성공에 개인의 능력적 요소만 아니라 부모의 문화적 자본이나 사회적 행운 같은 비능력적 요소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며 “정치학자 애덤 스위프트의 지적처럼,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만 보상하는 평등사회를 만들려면 ‘국영 고아원’을 만들어 모든 집 자녀를 똑같이 길러야 할 것이다. 능력주의가 실질적 기회평등을 보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가 평등하고 민주적이라는 신화는 학교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모든 분야에 퍼져있다”고 했다.
이어 “능력주의는 점차 확대되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까지 도덕적으로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며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능한 것으로 약속하면서 이상을 현실로 둔갑시키는 능력주의 신화나 현실의 불평등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비판을 받아 마땅하다. 능력주의 체제는 특정한 역사적 배경에서 생겨난 사회체제일 뿐 자연법칙처럼 신성 불가침한 것이 아니어서 끊임없이 비판을 받고 개혁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기독교 초기예루살렘공동체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내 놓은 재산과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었다.(행 2장과 4장) 그것은 ‘가난한 자가 없는’ 이상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었다.(신 15:5)”며 “우리는 이런 분배방식을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무시한 채 업적에 따라서만 분배하는 능력주의를 교정할 새로운 사회를 위한 상상력의 토대로 삼을 수는 있다”고 했다.
이어 “필요를 고려하는 분배정책의 이념은 사회적 연대의 가치에 기초하여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우대조치, 예를 들면 누진제적 조세제도나 복지제도를 통해 불완전하게나마 실현되어 가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재능 있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재능기부 같은 행위가 좋은 사회의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한국교회가 대형교회와 소형교회, 도시교회와 농촌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계층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소형교회나 농촌교회의 생존을 위해 어떤 제도적 장치를 만들 것인지는 결국 능력주의 사회의 문제해결에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조 교수는 “신약성서에는 능력주의 이념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달란트 비유’(마 25:14~30)가 있는가 하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포도원 일꾼과 주인의 비유’(마 20:1~16)도 등장한다”며 “포도원 일꾼과 주인의 비유에서 자비로운 주인의 행동에는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보상하는 하나님의 정의관이 나타난다. 반면에 일찍부터 일한 품꾼의 불평은 정의란 일한 만큼, 능력대로 차별적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능력주의 정의관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어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능력주의 사회의 정의관은 공로주의 신앙관과 상관성이 있다. 공로주의 신앙에서 구원이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며, 구원받는 사람은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며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하나님의 의에 의지한 은총과 선물로 보게 될 때 비로소 개인의 삶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 생긴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능력주의의 정신적 뿌리인 프로테스탄티즘과 유교문화가 중첩되어 있는 한국교회 안에서 능력주의 이념과 싸우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정이 될 것”이라며 “교인들 사이에는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적극적 사고방식과 ‘예수 믿으면 영적으로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축복받는다’는 번영주의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다. 목회자들 사이에는 교회성장과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교회성장주의와 성공주의 목회관이 지배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 영역마저 시장화 되면서 하나의 보편적 교회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고, 교회 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교회의 계층화나 목회자의 서열화는 당연시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역사 속 모든 사회 제도나 이념이 그렇듯이,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능력주의 사회시스템과 이데올로기 역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며 “능력주의는 혈통에 기초한 세습과 귀족주의를 타파한 공로가 있으나 지금은 형식적 기회평등과 더불어 경제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은폐된 엘리트 세습주의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문젯거리가 되었다”고 했다.
아울러 “기독교사회윤리학은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실질적 기회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불평등이 얼마만큼 존재하며, 능력에 따른 성과를 어떻게 재분배하는 것이 공정한 것인지 윤리학적 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동시에 교육과 노동에서 어떻게 공정성을 실현할 것인지 정치적 역량을 모으는 공론의 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며 “또한, 신학적으로 은혜로 구원받는 복음의 본질을 회복함으로써 감사하는 마음과 감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나는 나눔과 배려의 윤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교회가 세상 밖 능력주의 사회의 불공정을 비난하기에 앞서 교회 안에서 자비와 연대의 정신을 구현하는 대안사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모범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이봉석 교수(감신대)가 ‘한국사회능력주의와 기독교 윤리적 위상학에서 본 분배적 정의론 연구’, 신혜진 교수(이화여대)가 ‘능력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사회적 주체로서 ‘이성’을 중심으로’, 김성수 교수(명지전문대)가 ‘능력주의의 문제와 법의 역할: 볼프강 후버의 법윤리의 적용’, 이지성 교수가 ‘포도원 일꾼 비유로 본 능력주의 사회의 함정’, 최경석 교수(남서울대)가 ‘능력정의에서 연대정의로: 오징어 게임을 기독교윤리적으로 바라보기’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