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팬데믹이라는 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엔데믹에 와 있는 듯 하다. 아직 종식되지는 않았지만 작은 '희망'을 가져본다. 지난 2년간 우리는 어떻게 지내왔는가? 사랑하는 가족과 죽음 앞에서 이별을 해야 했고 전 세계 150만 명의 아이들이 부모를 잃었다.
배고픈 자식들을 위해 빈 솥에 돌을 넣고 밥하는 시늉을 하던 아프리카에 사는 엄마, 미국 워싱턴주의 한 요양병원에서 코로나19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손도 못 잡아보고 유리 벽 뒤에서 오열하는 딸, 멕시코에서 코로나19 에 걸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숨이 옅어진 할머니를 향해 인공호흡을 시도하던 손자 등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슬픔과 아픔의 시간이었다. 행복과는 멀어지고 근심 걱정만이 다가왔다. 코로나19 는 우리의 삶을 처참하게 만들었으며 비참한 미래를 보여주었다. 우리는 웃음을 잃어버렸고 소망 또한 사라져버렸다.
나는 십 수 년 전 뉴욕의 어느 유능한 지휘자 겸 교수님에게 오케스트라 지휘를 배운 적이 있다. 한 번은 나에게 뒷짐을 지게 한 후 지휘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 지휘자님은 직접 시범을 보이셨다. 얼굴 표정만으로 지휘를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지휘자님의 얼굴에는 악보가 있었다. 셈여림이 있었고 멜로디가 있었다.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어느새 나는 그 연주를 듣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고 많은 교훈이 되는 최고의 수업이었다.
이후 나는 합창단이나 교회 찬양대 지휘를 할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얼굴의 표정을 다양하게 지으려고 노력한다. 단원들은 나의 지휘하는 손을 보기도 하지만 얼굴을 참 많이 본다. 고맙게도 나의 표정은 단원들에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단원들의 얼굴에서도 다양한 표정들이 나타나곤 한다. 그 모습에 나 또한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마스크를 쓰게 되었을 때 그들의 얼굴 표정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사실 그들의 표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의 표정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스크는 다양한 표정과 아름다운 찬양 소리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찬양대로 하여금 오히려 애틋함과 간절함으로 다가왔고 어느새 찬양을 갈망하는 찬양 바라기가 되어 있었다. 현재는 많은 교회에서 찬양대의 찬양이 다시 울려 퍼지게 되어 정말 기쁘고 감사하다.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 음악은 수없이 많은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러한 박해 속에서도 전례 음악을 계승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찬송을 불렀으며(행16:25∼26), 신앙생활과 찬양 활동은 더욱 은밀하고도 결사적이 되었다. 초기 기독교의 약 2백 년 동안이나 지속되어 오다가 '밀라노 칙령(A.D. 313년)'이 선포되고, 380 년에 드디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된 이후 박해에서 벗어난 교회 음악은 음악적 체계와 수준이 향상되어 갔다('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하여', 기독교 이야기/찬송.찬양, 아촌, 2017).
비록 박해는 아니지만, 세속음악사인 르네상스 시대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다. 그 당시 많은 음악가들이 이 죽음의 전염병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으나,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음악을 만들고 연주도 하였다. 그들은 마치 흑사병을 연주한 것 같았다. 그 음악가들에게는 음악의 근원이 있었다. 그 근원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어둠과 치열한 사투를 벌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불씨가 지금의 풍성하고 거대한 음악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음악은 르네상스 이전부터 존재해 왔고 그 시작은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가장 오래된 음악사적 자료는 4대 문명 발생지(BC. 40 세기경)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 인도 등지에서 발굴된 악기나 악기의 그림 같은 것이며, 구약성서에 음악과 많은 종류의 악기에 관한 사항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 역시 고대 음악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두 길 서양음악사, 나남출판, 1997. P12). 이처럼 세속 음악도 처음에는 근원, 즉 하나님을 높이는 데서 출발했다. 우리의 근원은 예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음악의 근원도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팬데믹이라는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이러한 어둠은 곧 사라질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힘든 시기일수록 우리는 더욱 생명의 근원 되시고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흑사병을 연주했던 음악인들처럼 우리들도 코로나19 팬데믹을 영적으로 자유롭게 연주하는 믿음의 일꾼들이 다 되기를 소망한다. 찬송가를 보면 칸티클(canticle)로 쓰인 곡들이 많이 있다. 칸티클은 '성경에 기록된 실제적 찬송의 기록'을 말한다.
시편은 물론 찬송의 완벽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시편을 포함하여 성서상의 인물에 의해 직접 찬송했던 가사를 그대로 기록한 노래를 말한다. 예컨대누가복음에 나오는 샤가랴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천사의 노래 등 찬송의 기록을 가사와 함께 성서에 남겨진 노래를 말한다. 교회음악사에서 칸티클은 교회음악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어 왔고 실제 전례에서 많이 사용해 왔다(예배와 음악, 문지영 지음, 가온음 출판, 2019, P17 & 40).
칸티클인 시편은 다윗의 시, 노래이다. 다윗은 그가 왕으로 영광을 누렸을 때에나 죽음으로부터 쫓기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을 찬송했다. 이것은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 정말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노래가 나올 수는 없을 것이다. 총이나 칼이 목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아라. 이러한 상황에도 노래가 나온다면 아마도 정신이상을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 위기의 상황에서도 다윗은 왜 찬송을 했을까? 그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다윗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인지해야 한다. 즉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도 만드셨기에 우리는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존재들임을 확실히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 가 하나님이 내리신 팬데믹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진정으로 종식을 위해 기도해왔다. 르네상스 시대 음악인들은 흑사병에 대항하여 연주를 했고 우리는 영적으로 코로나19를 연주하기를 바라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나 현시대에나 동일하게 기적과 은혜를 베푸시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어둠의 때일수록 시편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린 다윗처럼, 우리도 더욱 주님께 기도하고 회개하며 찬양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팬데믹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팬데믹도 통치하고 계심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이정민(센트럴신학대학원 예배와 음악 겸임교수)
#이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