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한 남자의 변화된 인생 여정을 기록했다. 이 남자의 본래 이름은 “은혜 없음”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느 날 성경을 접하고 은혜를 받게 되면서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러자 그는 자신과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해석하게 되었다. 자신은 죄 짐을 짊어지고 있으며, 이 세상은 장차 멸망하게 될 성, 즉 ‘장망성’(將亡城)이라는 인식을 하게 됐다. 세계관의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성경을 통해 자신과 이 세상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자, 그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자신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열심히 살았던 이 세상을 등지고 순례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가족과 주변 이웃들의 만류와 설득과 조롱도 그의 순례길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히브리서 기자의 가르침처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이다(히 11:36).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등장한 크리스천에 대한 이야기는 특별한 신자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다.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받고 세계관이 변화 됐을 때 나타나는 현상을 아름답고 수려한 글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서 이런 세계관의 변화를 보는 것은 매우 희귀한 일이 되고 말았다. 작금의 기독교는 기독교인이라는 가지는 무성하지만, 열매나 실체가 없는 허수아비로 가득한 종교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이 시대 기독교는 긴급하게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할 시점에 놓여 있다.
세계관과 하나님에 대한 이해(신관/神觀-view of God)
세계관을 우리는 흔히 색안경으로 비유하곤 한다. 나름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해석’이라 생각한다. 그냥 해석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한 해석이다.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의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의 변화가 나타난다. 하나님께 대한 이해(신관/神觀-view of God)는 세상을 보는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제가 세계관을 결정하고, 이 세계관이 개인 생활과 문화, 사회, 정치, 학문의 방향을 결정한다(정성구,「칼빈주의 사상대계」,(총신대학출판부,1995),162.). 이 사실을 아주 명확하게 보여준 사건이 바로 창세기의 인류 타락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창 2:17). 이 엄중한 경고는 분명히 하와에게도 정확하게 전달되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아담은 최초의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와는 분명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된다는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뱀을 만나 유혹을 받으면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해석이 바뀌게 된다. 그러면 뱀은 어떻게 하와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에 대한 해석이 바뀌도록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이해(신관/view of God)의 왜곡이었다. 뱀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인식하도록 미혹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될까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못하도록 금지하셨다고 속였다. 놀라운 점은 하나님께 대한 의심, 혹은 하나님께 대한 이해(신관/view of God)의 변질은 즉각적으로 대상(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에 대한 해석의 변화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뱀의 유혹을 받기 바로 전에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에 대해 분명히 “죽을까 하노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뱀의 유혹을 받고 난 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하와의 해석(세계관)은 즉시 바뀌게 된다. 창세기 3장 6절은 하와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창 3:6)로 보였다고 한다.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들어가자 방금 전까지도 혐오스럽고 위험하게 보던 대상이 먹음직하고 보임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왜곡이 곧바로 피조 세계에 대한 해석(세계관)의 변질로 나타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이 사물을 보는 방식으로서의 객관성을 상실하고 탐욕과 우상숭배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신관(view of God)과 세계관의 상관관계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낸시 피어시가 “우리의 삶은 우리가 예배하는 ‘신’-성경의 하나님이든 그 밖의 다른 신이든-에 의해 그 모양이 결정된다.”고 한 말은 성경적으로 적절하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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