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견해
종교개혁자들은 이슬람에 관하여 많은 연구를 남겼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이 시작된 이듬해인 1518년, 『면죄부의 효력에 관한 논제 해설』(Resolutiones disputationum de indulgentiarum virtute)에서 처음으로 이슬람을 언급한 이래로 이슬람에 대한 많은 자료가 등장했다.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역했던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는 1567년, 이슬람에 대하여 16개의 주제를 정리하여 『터키인』(Der Tuergg)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데오도스 비블리안더(Theodore Bibliander, 1506-1564)는 1543년, 이슬람의 교리와 역사를 분석하고 꾸란을 라틴어로 번역한 『마호멧, 사라센의 영주들과 후계자들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꾸란』(Machumetis Saracenorum principis, eiusque sucessorum vitae, ac doctrina, ipseque Alcoran)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루터는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렇듯 여러 종교개혁자들이 오스만 터키의 위협 가운데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연구에 매진한 것을 보건데,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윌리암 에밀슨(William W. Emilsen)은 칼빈이 이슬람에 대하여 침묵한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꼽았다. 첫째, 칼빈은 '사격선(line of fire)'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즉 칼빈이 사역하던 지역은 오스만 터키와의 접경지역도 아니었다. 또한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해 터키인들과 경쟁했던 신성 로마 제국(the Holy Roman Empire)의 시민도 아니었다. 둘째, 프랑스 시민인 칼빈은 발루아 프랑스(Valois France)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 이익에 다소 공감했다. 왜냐하면 발루아 프랑스는 프랑스의 숙적인 스페인과 오스트리아의 명문가인 합스부르크를 전복시키려는 터키와 합류했기 때문이다. 셋째, 오스만 터키의 유럽 침공이 종교개혁의 확산을 부추겼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칼빈의 저서에서 에밀슨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직접적인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칼빈 이후에도 칼빈이 이슬람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대한 실질적인 연구는 단 네 편뿐이다. 첫째, 『칼빈과 터키인들』(Calvin et les Turcs)이라는 오래된 논문이다. 칼빈 크리스천 연구소(Calvins Christian Institutes)의 1541년 판의 편집자인 자크 파니(Jacques Pannier)가 90여 년 전 프랑스어로 쓴 비평적인 논문이다. 이 논문의 강점은 오스만 터키 제국의 위협 속에서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칼빈과 터키인』(Calvin and the Turks)이다. 네덜란드 학자 얀 슬롬프(Jan Slomp)가 2009년에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연구』(Studies in Interreligious Dialogue)라는 학술지(journal)에 게재한 것이다. 슬롬프는 현대 기독교-이슬람의 대화에 대한 장기적인 헌신의 맥락에서,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건설적인 견해를 제기한다. 셋째, 오스트리아의 퀸즈랜드 장로교신학교(Queensland Presbyterian Theological College)에서 신학자이자 역사가인 프랜시스 나이젤 리(Francis Nigel Lee) 교수가 강연한 내용이다. 나이젤 리 교수가 강의한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견해』(Calvin on Islam)와 관련된 자료는 인터넷으로도 검색이 가능하다. 이 연구의 장점은 칼빈이 이슬람에 대하여 정리한 귀중한 내용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칼빈의 수사학적 기법에 대한 이해가 충분치 못한 탓에 이슬람에 대한 언급이 덤덤하게 다루어졌다. 넷째, 2011년,『교회 연합 연구』(Uniting Church Studies)에 실린 윌리암 에밀슨의 논문이다. 칼빈 당시의 오스만 터키가 점령하고 있던 상황을 설명하고, 칼빈이 이슬람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이유를 정리했다. 이렇듯 칼빈이 이슬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한 연구는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칼빈이 이슬람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했다고 가정하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16세기에는 무슬림을 가장 일반적으로 터키인(Turks)으로 사용하였지만 ‘사라센인(Saracens)’, ‘무어인(Moors)’, ‘타르타르인(Tartars)’, ‘무함마단인(Muhammadans)’을 사용하였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터키인에 대해 4번, 사라센인에 대해 2번, 이슬람에 대해 모두 6번 언급했다. 또한 칼빈의 약 2,400편의 설교, 편지, 논평은 이슬람에 대한 일반적인(casual) 언급으로 가득하다. 한 예로 안토니 레인(Anthony Lane)은 1863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편집을 마무리한 『칼빈 작품전집』(Calvini Opera) 59권에 무함마드에 대한 언급이 33건 있다고 말했다, 이는 그 어떤 중세 작가보다 많은 수치이다. 게다가, 레인은 칼빈은 무함마드(Muhammed)와 같은 중세 저자들의 지식을 단지 인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시했다. 칼빈이 이슬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칼빈의 저서에서 이슬람과 관련된 구절을 읽고, 그 내용을 16세기 맥락에서 인식하고, 칼빈의 수사학적 기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존 칼빈은 대표적인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1536년)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신명기를 비롯한 방대한 설교문과 주석을 통해 이슬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슬람에 대한 칼빈의 이해가 루터처럼 로마가톨릭과 유대교에 연결 지어 전개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슬람에 대하여 처음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서서히 강경한 태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1536년) 초판에서 무슬림에 대한 평화적 태도를 보인다.
“그러므로 비록 교회적 권징에 따라서 출교된 자들과 친근하게 지내는 것과 내적인 교제를 갖 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혹은 권고로 혹은 교리로, 혹은 자비로 혹은 온유로, 혹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로 그들이 회심하여 더욱 좋은 열매 를 맺도록 교회의 연합과 하나 됨 안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한다.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무슬림들과 사라센인 그리고 참된 종교의 다른 대적들도 또한 이와 같이 다루어져야 한다.”
칼빈은 그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되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것의 사용을 금하든지, 그들의 인격을 모독한다든지, 칼과 무기로 협박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칼빈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슬람에 대해 강경한 태도로 변해갔다. 칼빈의 이슬람에 대한 태도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적으로 엄격하게 이슬람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오직 구원자라는 진리에 대해서 어떠한 타협도 양보도 하지 않았고, 이러한 개혁주의 신앙 원리를 이슬람에 적용시켰다. (계속)
#유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