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한다. 강력한 대통령제를 시행하는 대한민국은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겪어왔다. 지난 30여년 동안 우리 사회는 정권 교체기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역대 대통령의 역사인식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
정권 차원의 역사전쟁은 김영삼 정부로부터 시작되었다.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4월 19일 ‘4.19혁명 제33주년’을 맞아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수유리 4.19묘역을 참배하고 헌화했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은 "4·19혁명은 부정부패와 불의에 대항해 정의사회를 구현하려는 위대한 혁명이었다. 4·19혁명은 3·1운동 다음 가는 역사적인 의거로 재평가, 복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5월 13일에는 광주민주화운동 13주년을 앞두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담화」를 발표하면서 "오늘의 정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서있는 민주정부다. 앞으로 관련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정신 계승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천명했다.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저는 처절했던 5.18광주민주화 운동 때 야당 총재로서, 맨 처음 군부정권 당국에 정면으로 항의했습니다. 기자회견을 통하여 그 비극적 사태를 온세계에 알렸습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저는 3년 여에 걸쳐 가택연금을 당해야 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 되는 1983년 5월 18일, 가택연금 중에 저는 23일간 생명을 건 단식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광주의 유혈을 막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면서, 잃어 버린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오늘의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민주정부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복권과 명예회복, 그리고 그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하여 광주 시민 여러분과 같은 입장에 서서 고뇌하는 정부입니다. 또한 문민 정부의 출범과 그 개혁은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실현시켜 나가는 과정입니다. - 김영삼,「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특별담화」(1993.5.13) 중에서
그리고 6월 10일에는 '6월 항쟁 6주년'을 맞아 6월 항쟁을 주도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지도부와의 오찬에서 6월 항쟁을 '명예혁명'이라고 재평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행보를 통해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정당성을 강조한 김영삼은 8월 15일 제4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민정부가 수립된 1993년은 '신한국 창조의 원년'이자 '민족사 복원의 원년'이라고 주장하면서 '제2의 광복운동'을 선언하였다.
"48년 전 오늘, 우리는 벅찬 감격 속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습니다.... 이국땅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워 근대국가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자유, 평등,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공화국 건설에 나섰던 것입니다. 새 문민정부는 이 같은 임시정부의 빛나는 정통성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임시정부 선열 다섯 분의 유골을 봉환하여 국립묘지에 모신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옛 총독부 건물로 가 총독 관사를 철거키로 한 뜻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민족의 역사는 바로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신한국 창조'의 원년일 뿐 아니라 '민족사 복원'의 원년이기도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지금 '제2의 광복운동'에 나서고 있습니다." - 김영삼 <제48주년 광복절 경축사> 중에서
김영삼 정부의 역사전쟁은 광복 50주년을 맞이 한 1995년 들어 본격 추진되었다. 2월부터 일제가 한반도의 정기를 끊고자 전국 방방곡곡의 명산대천에 박아뒀다는 '쇠말뚝 뽑기 사업'을 실시하고, 8월 15일에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했다.
이렇게 친일잔재 청산을 계속하면서, 12월에는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역사전쟁을 벌였다.이 특별법은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행위에 대해 공소시효를 정지하고, 헌정질서 파괴범죄자에 대해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경우에는 고소 고발인이 재정신청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결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은 12·12 쿠데타와 부정부패 혐의로 역사적 단죄를 받았으며, 광주에는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고 5월 18일을 기념일로 지정해서 정부가 공식적인 행사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김영삼 정부의 역사바로세우기는 친일잔재 청산, 군사독재 청산, 4.19로부터 5.18에 이르는 민주화운동의 정립 등의 세 갈래로 추진되었다. 구체적인 실행 계획으로는 조선총독부 철거 및 경복궁 복원, 하나회 숙청, 청와대 안가 철거, 5.18기념일 제정 및 기념사업 등을 단행했다. 한국정치사에서 보수진영에 뿌리를 둔 김영삼 대통령이 일제 잔재와 군사독재 청산을 명분으로 '역사바로세우기'를 주창한데는 문민정부의 국정개혁을 담당한 김정남(청와대 교육문화 수석), 한완상(통일 부총리)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영삼 정부는 출범 초 역사바로세우기를 통해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그에 대한 지지율은 80%가 넘었다.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청사) 폭파와 청와대 안가 철거는 권위주의 청산이라는 점에서 윤석열 당선인의 대통령 집무실 용산 이전과도 비교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김영삼의 역사바로세우기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이용했다고 비판한다. 문민정부의 역사적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고 주장하고, '신한국 창조 원년'과 '제2의 광복'을 선언한 것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의 역대 정권을 부정하는 역사전쟁의 선포였다. 평생을 학술전문기자로 활동한 원로 언론인 박석흥은 그의 저서 『역사 전쟁』에서 이렇게 지적한다.
"권위주의 정권을 종식시키고 32년 만에 문민정부를 세운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보다 민족이 중요하다'고 공언하고, '문민정부는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선언함으로써, 1948년 건국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역사전쟁'의 불을 붙였고, 초·중·고교 역사 교육과정 개편에 착수하여 역사교육과 사관논쟁을 일으켰다."
김형석 교수(고신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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