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에선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와 박용규 교수(총신대학교 명예교수, 교회사)가 각각 ‘조미통상조약의 체결 과정과 그 의의에 대한 재고찰’과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의 연관성’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먼저 박명수 교수는 “올해는 조미수교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과 미국이 공식적인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이후이지만 미국과 조선이 정식으로 국교 관계를 맺은 것은 1882년이다. 1882년 맺어진 조미조약은 조선이 처음으로 서양 국가와 맺은 조약이며, 이 조약을 통해서 조선은 근대 서구 질서에 편입되었다”라고 했다.
이어 “조미조약은 많은 외국학자의 관심 대상이었고, 일찍이 여기에 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 특별히 1930년대를 전후하여 주로 선교사 2세들이 미국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의 형태로 상당한 업적을 이루었다. 그 이후 조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1882년을 전후로 다시 한 번 영어로 된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왔지만, 그 이후에는 특별한 연구가 눈에 띄지 않고 있다”라며 “한국 학자 중 문일평 학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최초로 관심을 가졌었다. 그 후 1960년대를 전후하여 많은 학자들이 조미조약과 한미관계의 기원에 관해서 연구했다. 그러나 역시 조미조약과 초기 한미관계에 관한 연구가 큰 활력을 얻은 것은 역시 조미수교 100주년이 되는 1980년대 전후이다. 하지만 그 이후 한반도에는 상당한 반미운동이 불어왔고, 몇몇 연구 외에는 이렇다 할 업적이 보이지 않고 있다”라고 했다.
이어 “조미조약이 맺어진 근본적인 이유는 동북아시아 구조의 재편에 따라 조선의 위치를 재정립하려는 것이다.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방이었으나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래 천황 중심의 국가가 되었고, 여기에 근거해서 새로운 국가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서계문제를 내세워 여기에 불응했고, 일본은 중국과 국교를 맺는 것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렇게 해서 1871년 청일수호 조약이 맺어졌다”라며 “조미조약이 추진되는 보다 직접적인 요인은 1879년 일본의 유구합병과 거기에 대한 대책이다. 중국의 이홍장은 조선이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지킬 것을 요청하였다. 만일 조선이 일본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일본은 이것을 구실로 조선을 정복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홍장은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조약을 지킬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조선에 서양 국가들과 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러시아의 위협이 가세됐다. 조선은 일본의 요청으로 1880년 원산을 개항장으로 만들었고, 이것은 오랫동안 동해안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를 자극했다. 러시아의 남하를 걱정하던 일본과 중국은 러시아 문제에 있어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서양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양의 각국은 중국에 조선과를 교역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요청을 중국 정부에 하고 있었다. 중국정부는 이런 기회에 서양 각국과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를 통해 외환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통적인 중화 질서에 의하면 속방의 외교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 없으므로 중국 황제는 조선과 오랫동안 관계를 맺어 온 이홍장에게 1879년 7월 5일에 이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이어 “처음부터 조미조약을 맺으려고 시작한 것도, 그리고 주도한 것도 중국이었다. 그러나 만국공법에 따라서 미국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미조약에서 그의 위치는 불분명하게 되었다. 결국 조미조약을 통해서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한 중국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자신의 종주권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미조약이 맺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만들어서 자신의 종주권을 확인하려고 했다. 결국 조선이 중국의 종주권에서 벗어난 것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다음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으로서는 조미조약은 서구열강과 관계를 맺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미국과 조약을 맺은 다음에 영국, 독일 등이 뒤따랐고, 이탈리아, 프랑스가 뒤를 따랐다. 결국 이 조미조약을 통해서 한국은 서구세계와 만나게 되었고, 이 통로를 통해서 서구민주주의와 근대과학 문명이 들어오게 되었다”라고 했다.
끝으로 박 교수는 “조선은 기독교 선교를 거부했지만 결국 이 조미조약을 통해서 기독교가 들어왔고, 이것은 한반도를 대륙의 문화에서 해양의 문화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조미조약은 중화 질서가 무너지고, 한반도가 새로운 질서로 진입하는 첫 출발이 된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강연한 박용규 교수는 “올해는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지 140주년을 맞는다. 1882년 이 조약이 한국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교회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필요하고 중요하고 또 대단히 흥미로운 일이다. 누구나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이들이라면 이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라며 “1882년 조약이 체결되고 그 이듬해 1883년 보빙사 일행이 미국에 파송되자 미국의 당시 많은 주요 신문들은 깊은 관심을 가졌다. 미국의 주요 언론들이 조약이 체결된 후 1883년 9월 미국에 도착한 보빙사 외교 사절단을 아더 대통령이 영접하는 기사를 게재했고, 이것은 은둔의 나라 조선에 관한 관심을 환기해주었고 한국선교를 빠른 시일에 착수하도록 강력한 도전을 주었다”라고 했다.
그는 이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을 지낸 제너럴 Foote가 미국 정부의 파송을 받고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한국 주재 미국의 첫 외교관이었다. 그는 고종황제에게 보빙사를 파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보빙사 일행이 미국에 가서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예기치 않게 몇 가지 점에서 한국선교의 중요한 전기가 찾아왔다”라며 “보빙사 일행은 윌리엄 그리피스와 만나 한국선교에 대해 중요한 정보들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당시 감리교 목사였던 가우처 목사를 만나 한국선교를 촉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이어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의 관련성은 감리교 선교 개시만 아니라 장로교선교 과정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미국 북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총무 엘린우드(Frank F. Ellinwood, 1826-1908)는 한국선교가 시기상조라는 당시 주변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지금이야말로 한국선교를 착수할 때라며 강력하게 한국선교를 촉구했다. 그는 1882년 한국과 미국 사이의 조약체결이야 말로 한국선교를 착수할 절호의 기회임을 입증해 준다고 판단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선교의 중요성과 시급성을 일깨워주기 위해 다방면으로 활동했으며 그 중 1884년 미국 북 장로교 총회에서 참석자들에게 호소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뉴욕 브룩클린(Brooklyn)의 라파엣 애브뉴 장로교회(Lafayette Presbyterian Church) 장로이며 북장로교 해외선교부 위원이었던 맥 윌리엄스는 깊은 도전을 받고 한국선교를 목적으로 6천 달러를 헌금했다. 이후 미국북장로교해외선교부는 더 이상 한국선교 지체하지 않고 선교 활동을 활성화 했다”라고 했다.
박 교수는 이어 “앞서 언급한 대로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다양한 사람, 다양한 관련 사건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한국선교를 가능하게 만든 너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한국에 공관의 자격으로 입국한 알렌의 입국도 사실 1882년 조약에 체결되어 미국공관이 서울에 주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는 점에서 1882년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는 모종의 깊은 관계를 갖는다”라며 “한 세기가 훨씬 지나 조미수호조약 140주년을 맞는 오늘날 1882년 조미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진행된 한국선교 과정을 예의 주시하면서 우리는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2년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1882년의 조약 체결에 따라 푸트가 공사로 입국했고, 그의 청원에 따라 1883년 조선 정부가 파송한 보빙사 일행이 미국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가우처와 그리피스를 만나고, 가우처가 한국선교를 타진하는 편지를 일본주재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에게 보내 맥클레이가 1884년 6월 한국을 방문하고 김옥균을 통한 청원 3일 만인 7월 3일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사역에 대한 윤허를 받아낸 것”이라며 “이 같은 일련의 역사적 과정은 조미수호조약과 한국선교와의 관계를 너무도 잘 보여준다. 맥클레이로부터 고종황제로부터 교육 및 의료사역에 대한 윤허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 감리교는 스크랜톤과 아펜젤러를 한국선교사로 임명했다”라고 했다.
끝으로 박 교수는 “미국북장로교해외선교부 총무 엘린우드의 1884년 북장로교총회에서 행한 호소의 결정적인 근거 역시 조미수호조약이다. 엘린우드는 조약과 다른 관련 움직임을 제시하며 한국선교를 ‘하나님의 섭리적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라고 밝혔다. 1882년과 이어 진행된 조약체결은 중국 주재 길버트 리드 선교사가 북장로교해외선교부에 한국선교를 바로 착수하라고 촉구하는 근거였고, 이것은 또한 언더우드의 동료 앨트먼이 한국이 복음에 대해 문호를 열도록 기도하자고 촉구하는 결정적인 근거이다. 1882년 미국과의 조약은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이었지만, 이것은 미국과의 수교뿐만 아니라 선교관계를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