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와 한국교회사학회가 26일 오전 10시 한국성서대학교 일립관에서 ‘주일학교 교육의 역사: 한국주일학교 연합회 100년’이라는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는 온·오프라인 동시에 진행됐다.
주제발표를 맡은 박용규 교수(총신대신대원 명예교수)는 ‘주일학교운동과 조선주일학교연합회’라는 주제로 발제했다. 박 교수는 “1922년 결성된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올해로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한국선교가 시작된 이후 주일학교는 한국교회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며 “개신교 선교사들은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선교사역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생각했다. 그들은 주일학교를 중시하는 미국의 신앙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19세기 인디애나주 개척민들이 설립한 하노버대학 신학부로 출발한 맥코믹신학교는 교수와 학생이 하나 되어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로 매일 수업을 시작했으며 주일 오전에는 교수들이 주일학교에서 가르치고 주일 오후에는 학장이 예배를 인도할 정도로 학문과 경건을 조화시켰다”며 “신학교교육이 주일학교와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며 진행된 것이다. 사실, 이 같은 전통은 맥코믹신학교만의 전통은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신학교들도 마찬가지였다. 선교사들은 그런 전통 속에서 교육을 받고 파송되었고 그런 방향에서 한국선교를 착수했다. 때문에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일찍이 주일학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록으로는 1886년 6월 제2회 미감리교선교회 보고서에서 감리사 아펜젤러는 지난 1년 동안의 감리교 선교사역을 보고하면서 세례교인 1명, 원입교인 100명, 주일학교 학생 12명, 매일학교 학생 30명과 병원 1개라고 밝혔다”며 “1883년 3월 11일 아펜젤러는 자신의 일기에 ‘어제는 14명이 참석’했고 ‘이제부터 영어로 말하는 주일학교를 내 집에서 시작’ 했으며 시간은 30분으로 제한했다고 적었다. 스크랜톤 여사는 1888년 1월에 ‘이화학당에서 12명의 소녀와 3명의 부인, 3명의 선교사, 그리고 선교본부의 한 명으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곽안련에 따르면 1890년에 주일학교가 시작되었고, 1897년에는 평양에만 주일학교가 다섯 개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은 주일학교를 처음부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로 받아들였다. 한국에 파송된 북장로교선교회와 남장로교선교회는 선교의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부가 개설된 후에는 개척예배와 주일학교를 거의 동시에 가장 먼저 착수했다”며 그 구체적인 사례가 남장로교선교회의 전주선교부 출범의 경우이다. 레이놀즈와 테이트 두 선교사는 1897년 3월 6일, 토요일 정식으로 전주 선교부 출범예배를 드리고 바로 그 다음날, 3월 7일 주일 8명이 참석한 가운데 주일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주 3월 14일에는 2명이 더 참석하여 10명이 두 번째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2주가 지난 1897년 3월 28일 주일날 4명의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주일학교를 착수했다”며 “초기 선교사들에게 복음을 접한 이들은 백홍준과 이성하가 증거 하듯 선교사들과 함께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 지도자로 성장했다”고 했다.
또한 “주일학교는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선교보고를 할 때도 ‘교회와 주일학교’ 현황을 동시에 보고했다. 아펜젤러는 세상을 떠나기 전 1902년 5월 그의 마지막 보고서에도 자신이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를 맡고 있다고 기록했다”며 “‘우리는 현재 세 장로사와 세 지방회가 있고 입교인이 1,296명, 학습인이 4,559명이 있으며, 14명의 본처 전도사와 47개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1907년 한국선교를 착수한 동양선교회 역시 처음부터 주일학교를 중시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우리는 1884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이 단계적 발전과정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884년 알렌이 입국하여 한국선교가 진행되었고 이어 입국한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스크랜톤 여사는 주일학교를 착수하여 실시했지만 주일학교가 하나의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전한 것은 1905년 장로교 4개의 선교회와 2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한국복음주의연합공의회를 결성하고 그 안에 주일학교위원회를 설치하면서였다”며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은 주일학교 발전의 기폭제가 되어 주일학교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고 했다.
이어 “또 한 번의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은 1919년 삼일운동 이후에 진행되었다. 사회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장로교가 진흥운동을 감리교가 세기운동을 전개하면서 주일학교운동이 사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한국교회와 선교회 차원에서 연합으로 추진되었다”며 “1910년대와 1920년대 장로교와 감리교의 주일학교연합운동은 한국교회사에 높이 평가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습이었고 이것은 주일학교 발전의 도약을 가져다 준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래서 기독신보는 1924년 한국교회 발전은 주일학교 발전에 있었다고 증언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그 이듬해 1922년 11월 1일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결성되면서 주일학교운동은 더욱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주일학교협회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던 한국의 주일학교 지도자들은 도움과 협력을 요청했고, 1920년, 1924년, 1928년, 1932년 세계주일학교대회에 대표를 파송하고 세계주일학교협회에서 간행하는 만국통일공과를 주일학교 교재로 채택하고, 수많은 주일학교 관련 서적들과 잡지들을 간행하여 한국의 주일학교를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며 “국내에서 1921년 제 1회 전국주일학교대회를 개최한 후 1925년 제 2회 대회, 1929년 제 3회 대회, 그리고 1933년 제 4회 대회를 개최하여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을 전개했다”고 했다.
또한 “동시에 하기여름성경학교를 개설하여 수많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가졌다”며 “아희생활을 비롯한 수많은 주일학교 저널들이 복음에 목마르고 교육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청소년들의 갈증을 채워주었다. 성경구락부 역시 주일학교, 하기아동성경학교와 더불어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채널이 되었다. 이와 같은 강력한 주일학교운동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식민정책의 강화 속에서 큰 시련을 맞게 되었고, 급기야 감리교의 엡웻청년회, 장로교의 조선면려청년회(CE)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와 더불어 1938년 6월 21일 강제 해체를 당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는 “1945년 해방이 되고 1947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재건되면서 한국교회 주일학교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영향력 있는 한경직 목사가 해방 후 초대 회장을 맡으면서 한국의 주일학교운동은 다시 재건되기 시작했다”며 “1948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가 대한기독교교육협회로 개칭되어 단순히 주일학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아니라 기독교학교를 포함한 기독교교육 전반으로 지평을 넓혀간 것은 세계적인 흐름과 국내의 시대적 요청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이어 “연합운동으로 진행된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59년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 이어 감리교와 성결교가 분열되면서 연합운동으로서의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위기와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 결과 1960년 이후 한국주일학교운동과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았다”며 “WCC 에큐메니칼운동과 이를 반대하는 NAE측의 분열이 주일학교운동 특별히 전국적인 주일학교연합체인 한국기독교교육협회가 여전히 연합운동의 기구로 존속했지만 WCC-WCCE 노선에 따라 ‘하나님의 선교’ 방향에서 기독교학교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0년대 변화되는 상황에 맞추어 ‘기독교교육’을 창간해 처음 계간지로 출발해 격월간지로 다시 월간지로 발전하면서 ‘기독교교육’이 국내유일의 교사지로 전국의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 한국기독교교육협회는 WCC 에큐메니칼운동의 찬반으로 한국교회가 분열됨으로 말미암아 반쪽만의 연합체로 변화되었고, 그나마 1968년 성결교가 독자적인 주일학교 공과를 출간하고 1972년 예장통합이 그 전철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입지는 상당히 축소되고 말았다”고 했다.
아울러 “그 결과 과거 1930년대 한국교회가 가졌던 강력한 ‘조선주일학교연합회’와 같은 위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며 “이런 시대적 변화 속에 대한기독교교육협회는 1969년 기관지 ‘기독교교육’을 국내 유일한 교사지로 탈바꿈시키고 주일학교교사 중심의 연합기관으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2015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하고 문을 닫는 위기에 직면하고 말았다”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김웅기 교수(한국성서대)가 ‘일립 강태국의 교육사상이 기독교학교 교육에 주는 적용점 연구’, ▲이영식 교수(총신대)가 ‘초기 한국교회 주일학교연합활동의 발전과 장로교 사례’, ▲박경수 교수(장신대)가 ‘아르굴라 폰 그룸바흐의 저항과 항변: 아르사키우스 제호퍼 사건을 통해 본 여성 평신도 프로테스탄트의 자기정체성’, ▲배정훈 교수(고신대)가 ‘천국에서의 헛된 영광을 바라보며: 구제와 헛된 영광에 대한 요한 크리소스톰의 사상’, ▲전광수 교수(국제신대)가 ‘개혁 신학자들 사이의 명백한 불일치?: 바빙크의 영혼불멸론에 대한 후크마의 평가 재고’, ▲김은하 교수(장신대)가 ‘20세기 초 팬데믹 시대의 움튼 여성들의 우정: YWCA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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