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강좌에서는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가 ‘마포삼열의 내한과 한국 선교’, 박응규 교수(아신대학교 역사신학)가 ‘마포삼열과 한국장로교회의 부흥’, 이승구 교수(합신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가 ‘마포삼열의 신학과 그 의미’를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첫 발제자로 나선 이상규 교수는 마포삼열(馬布三悅)이라는 한국이름으로 익숙한 사무엘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선교사의 사역을 △선교사로서의 준비와 내한, △서울에서의 활동, △평양에서의 선교활동, △마펫의 기여와 신학, 신앙유산으로 나눠 총론적으로 다뤘다.
이상규 교수는 “마펫 선교사는 한국장로교의 기초를 놓은 인물로서 동료선교사였던 곽안련은 그를 한국교회를 낳은 아버지라고 불렀다. 마펫 선교사는 1890년 1월 25일 자신의 26번째 생일날 한국에 와서 44년간 선교사로 일했다. 은퇴 후 한국에 2년간 더 체류한 뒤 본국으로 돌아가 75세에 세상을 떠나셨으니 본국인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많이 사셨던 선교사"라고 했다.
이어 "마펫 선교사는 에수교학당 책임자로 일하는 동안 서울 이북지방을 순회 전도하여 장대현교회를 비롯한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우리나라 첫 장로교신학교육기관인 조선야소교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해 24년간 교장으로 활동했다. 또 학교교육에 관여하여 교육선교사로 활동했고, 한국 장로교 제도의 기초를 놓았다"고 했다.
또 "3.1운동 당시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등 만세운동의 숨은 공로자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내한했던 1,55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중 가장 뛰어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키가 183cm였던 마펫 선교사는 자신의 키 만큼이나 우뚝 선 인물로서 한국교회를 위해 기여한 선교사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교회의 실제적인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이 교수는 "마펫은 알렌 이래로 내한한 북장로교의 13번째 선교사였다. 부임 후 언어공부에 전념하던 마펫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예수교학당을 관장하는 일이었다. 그는 언더우드에 의해 출발한 예수교학당의 제2대 학당장이 되어 2년 6개월간 책임을 맡았다. 마펫은 1893년 1월 이후 서울-평양을 왕래하며 평양지부를 개척한다. 1884년 알렌의 내한으로 시작한 미국북장로교의 그동안의 한국선교는 서울을 거점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한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평양과 부산에 새로운 선교지부를 개최하기로 결의하고, 부산에는 윌리엄 베어드를, 평양에는 마펫을 개척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했다“고 했다.
이어 “이것은 관서지방 선교를 위한 의도였다. 조선시대 서울에 이은 제2의 도시인 평양은 관서 지방의 중심도시로서 경제, 문화, 교통 중심지였다. 1893년 당시 평양의 인구는 10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북장로교선교부는 이 지역을 선교의 전략적 거점으로 여겨 마펫을 개척 전도자로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도 마펫은 여러 차례 전도여행을 떠나 장차 일하게 될 이북지방을 순회하게 되는데, 평양을 방문을 통해 그곳의 선교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게 된 것이 그의 평양으로의 이거의 배경이 된다”고 했다.
이어 “평양지부로 배속된 마펫은 이곳을 중심으로 순회전도를 시작하였는데 불신자들로부터 조롱과 야유를 당하기도 했고, 후일 목사가 되는 이기풍이라는 청년으로부터 돌을 맞아 피를 흘리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실하고 대담한 전도사역은 결실을 가져왔고, 1893년에는 평양에서의 최초의 교회인 평양 장대현교회를 설립하게 된다"고 했다.
이어 "이 지역에서의 마펫의 기여는 대단한 것이었다.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여 예배당이 협소하여 1898년부터 2부 예배를 실시했다. 1899년 3월에는 예배당 신축 계획을 세웠고, 1,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ㄱ자 모양의 교회당이 1903년 완공되었다. 장대현교회는 계속 성장하였고 이 교회 사역이 계속되어 점차 평양과 그 주변 지역에 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장대현교회는 평양의 모교회이자 관서지방의 모교회가 되었고, 거듭된 분가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계속 성장하여 1906년 당시 약 1,500여 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발전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마펫은 지역 순례와 개척전도, 교회설립에도 큰 기여를 했지만, 가장 큰 공헌은 신학교의 설립이었다. 1900년에 세례교인의 수가 287개 처 교회 3,690명으로 증가하자 한국인 지도자 양성은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평양공의회의 마펫은 서울에서 시행해 오던 신학반을 정규 신학교로 전환하여 교육하려고 구상했다. 평양공의회는 ‘신학과정 위원’을 선정하고 장대현교회의 두 장로 김종섭과 방기창을 목사 후보생으로 선정하고 마펫은 자신의 집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이것이 장로교신학교의 시작이었다”고 했다.
이어 “1902년 신학과정위원은 교육 기간을 5년으로 하여 5학년의 전과목을 결정하고 1903년에는 평양공의회에서 추천된 6명을 데리고 제1학년 과정을 3개월간 가르쳤다. 이렇게 평양신학교가 정식 개교되었다. 평양신학교 발전과정에서 마펫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마펫은 교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333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혼신의 힘을 쏟았다. 한국에서의 장로교 신학교육에 있어서 마펫의 기여는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어 “마펫은 한편 평양지방의 학교 설립에도 관여하거나 영향을 끼쳤고 직접적으로 학교 교육에도 관여하였다. 특히 그는 평양의 ‘3숭’으로 불리는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숭실대학), 숭의여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학교운영자금을 모금했고, 미국북장로교 선교본부와 접촉하여 학교 시설, 교사 수급과 봉급 확보 등을 도왔다. 특히 마펫은 숭실학교의 제3대 학장으로 10년간 학교교육에 진력하였고, 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서의 영향력 있는 교육기관으로 성장했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펫은 평양신학과와 평양과 그 인근 학교의 설립과 교육, 교육적 기여 때문에 그를 대표적인 교육 선교사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마펫은 한국장로교의 설계자이자 장로교 치리회 구성과 조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가 설립한 평양의 신학교가 1907년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자 한국교회의 독자적인 치리회 조직이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1907년 9월 노회가 구성되는 데 이를 독노회라고 불렀다. 이때 마펫은 첫 노회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장로교 치리회 조직에 기여하게 된다. 한국장로교회 제도 형성기에 마펫은 호주장로교의 엥겔과 더불어 주요한 역할을 했다. 마펫은 신학교육위원회 책임자로 신학교육 문제를 주도하였고, 교회정치위원회 책임자로 한국장로교회의 정치 제도를 확립하는 일에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고 했다.
이어 “마펫은 장로교회의 제도적인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학습, 세례, 입교 과정에서 신생교회인 한국교회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당시 선교사들이 직면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조상제사 문제와 중혼(重婚) 혹은 복혼(複婚)의 문제였는데, 마펫은 친구인 베어드와 더불어 엄격한 윤리적 표준을 제시하고 조상제사 금지는 물론 복혼관계를 실제로 청산하기 전에는 세례를 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것이 신생교회에게 바른 윤리적 가치를 심어주는 것이고 그렇게 해야만 건실한 장로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마펫은 1901년 이래로 신학교육위원회와 교회정치위원회를 이끌면서 한국에서의 장로교 제도와 의식을 문서화하고 제도화했다. 이런 점에서 곽안련은 그를 한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마펫은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으며 광의로 말하면 건실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신봉했고, 역사적 기독교 혹은 장로교 전통을 따라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고수하였고,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를 신뢰했다. 특히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중시했는데 이런 신학적 견해는 매코믹신학교 전통을 추수하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도’는 그가 늘 강조했던 가르침과 설교의 중심이었다. 마펫은 ‘조선교회에 기함(고전 2:8)’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나는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기 전에 황주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결심한 바 있다. 나는 이 나라에서 ‘십자가의 도’ 외에는 전하지 않기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죽든지 살든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로 굳게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의 다짐처럼 한국에서 체류하는 45년 동안 십자가의 도를 전한 선교사였다"고 했다.
이어 "마펫은 신학교육을 통해 한국교회를 건실한 보수주의신학의 토대위에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1909년, 첫 25년간의 한국에서의 선교를 회고하면서 한국교회 신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교부와 교회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투철한 신념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열성적인 복음정신으로 특징 지워질 수 있다.” 그로부터 다시 25년이 지난 1934년은 북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지 50주년이 되는 해이자 현대주의 신학으로 논란을 겪던 해였다“고 했다.
이어 “이 때 마펫은 조선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죽는다든지 혹은 귀국하든지 조선교회 형제여 40년 전에 전파한 그 복음을 그대로 전하자고 했다. 마펫의 이 진술은 자신의 신학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초기 신학이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 신학이었음을 암시한다. 또 당시 한국교회 일각에서 제기되는 진보신학 혹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우려는, 한국교회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어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성령의 역사를 믿고 의지하고 그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 아시아에서 한국교회가 건실하게 성장한 이유에 대해 그는 교회성장의 근원적 요인이 성령의 역사라는 점을 드러냈다. 마펫은 ‘편지 쓰는 선교사“라고 불릴 만큼 많은 편지를 남겼다. 그가 남긴 편지는 『마포삼열 자료집』 1,2,3,4으로 편집, 출판되었고 마펫과 한국선교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마펫은 1934년 1월 25일 은퇴 후에도 평양에 거주하던 마펫은 열사병에 걸려 언어장애가 왔고, 요양차 한국을 떠났다. 그는 한국에서 커다란 자취를 남기고 그에게 돌려질 수도 있는 영광을 뒤로하고 말없이 한국을 떠난 것이다. 치료를 받고 다시 한국에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그의 아내의 병 때문에 한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939년 10월 25일 캘리포니아 주 몬로비아에서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이어 “마펫의 자녀 중 셋째 아들 휴 마펫(마삼락)은 아버지를 이어 제2대 한국선교사로 내한해 장로회신학대학 교회사 교수, 아시아연합신학대학 초대 학장, 연세대학교 숭실대학교 대한성서공회 이사 등으로 봉사했다. 그는 한국인의 신앙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The Christians of Korea)이라는 제목의 책을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들이다. 모진 고난을 이기며 환란 중에서도 주를 사모하며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기도에 힘쓰며 전도에 열심이다.” 이것은 그의 선친이 한국에 심어준 신앙의 유산이었다. 넷째 아들 하워드 마펫(마화열)은 6.25 전쟁 때 미해군 군의관으로 참전해 9.28 서울 수복에 참여했다. 다섯째 아들 토마스 마펫은 미국에서 목회자로 활동했다"며 그의 가계와 신앙 유산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