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랑해서,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사랑하며 키운 이 아들을 사랑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설교는 많이 들었지만, 그 사실이 처음으로 내 가슴에 깊이 들어와 믿어졌다. 99일째가 되는 날까지도 사서함은 텅 비어 있었다. 100일째 아침, 남편은 말라위를 떠나야겠다며 짐을 싸놓고, 마지막으로 사서함을 한번 열어보자는 생각으로 우체국에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독일 병원선교회에서 보내온 5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처음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목사님의 이런 권면을 받아들여 사역을 철저히 문서화하여 선교회의 재산을 법적으로 지킬 수 있었고,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중간 위치의 직분으로 사역한 덕분에 우리를 쓰러뜨리려던 여러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박상원 – 하나님, 살리시든지 데려가든지 하세요!
그러다 보니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 시점에 내가 혼자 있기는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더 큰 공동체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우리’라고 말할 때 이는 내가 다니는 신학교 공동체를 포괄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그 시간에 학우들도 다른 곳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주 자연스레,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할 때 나는 학우들, 선생님, 학교 운동장 관리인, 학장님의 비서를 위해서도 기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두가 다 “우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시간에 나와 더불어 기도하고 있는 “우리”의 범위가 점점 커졌다. “우리”에는 내가 주일마다 출석하는 교회도 포함되었다. 그 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교회도 “우리”에 포함되었다. 그 교회들뿐만 아니라 나처럼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하는 수많은 사람으로 이뤄진 먼 나라의 다른 많은 교회도 있었다. 알지도 못하고 생각한 적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우리는 다 공동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후스토 곤잘레스(저자), 오현미(옮긴이) - 초기 교회에서 배우는 주기도문
예수의 길은 인간중심주의적 휴머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씨앗을 발견하고 사람과 자연과의 올바른 관계를 이루는 참된 휴머니즘의 길에 이르도록 하고 있다. 예수의 길은 휴머니즘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완성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인간’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은 1세기 팔레스타인 땅을 거닐던 예수의 행적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예수가 우리 시대에 계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이 물음은 끊임없이 물으며 시대의 과제 앞에서 성령과 더불어 예수가 하시고자 했던 그 뜻을 우리 시대에 실현하는 것이 참 제자의 길이다.
이상덕 – 예수의 길 인간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