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란노서원이 故 이어령 교수(이화여대 국문과)의 신간 <먹다 듣다 걷다>를 출간했다. 이 책은 저자의 유작이며 그는 ‘기독교가 사회에 무슨 역할을 해줄 수 있는가?’, ‘우리가 하고 있는 대사회적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없는가?’라는 문제의식을 토대로 이 책을 집필했다.
기독교 대사회적 정체성에 대한 질문 앞에 저자는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의 방향을 되짚어보기 위해 세 가지를 주목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익숙한 교회를 향해 저자는 “예수님의 생애는 대단히 역동적인 사건”임을 언급하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역동성”으로서의 기독교 정체성을 세 가지 동사로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교회가 할 일을 3가지 동사로 이야기한 데는 의도가 있다. 이제까지 기독교는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대부분 명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해 왔다고 생각한다. ‘영생’이 가장 중요하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독교의 상징적 키워드를 제시해 왔다”라며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 가운데 우리의 일상 현실 속으로 성육신하시고 그로써 역사의 일부가 되셨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생애는 대단히 역동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이런 예수님의 존재와 가르침을 압축적인 명사로 규정하게 되면 도덕적 덕목으로 축소되기 쉽다. 이를 동사로 받아들여서 모든 생명체에 적용 가능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역동성을 얻어야 한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과 같아지시기 위해 먹고, 듣고, 걷는 행위로 뛰어드셨는데, 인간이 이를 다시 추상화할 필요가 없다”라고 했다.
이어 “우리는 주기도문을 고백할 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고백한다. 일용할 양식을 옛날에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지금은 보건복지부나 정치인들이 주려고 한다.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단순한 일용할 양식이라면, 사람들은 더는 교회에 나올 이유가 없다. 즉, 교회의 복지는 정치나 사회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복지와 달라져야 한다. 예수님의 ‘먹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의 복지 개념도 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먹는 것도, 먹지 않는 것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다. 감사 기도야말로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리다. 뭔가를 주고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밥을 먹으면서 감사할 줄 알게 하는 것이 교회에서 해야 할 진정한 복지의 시작이다”라며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그분의 권능으로 맹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아님을 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섬겨야 하는 사람들은 결국 죽어야 할 사람들,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며 우리도 이 목적을 의식하면서 일탈해야 한다”라고 했다.
저자는 이어 “세속적 유구의 세계를 만족시키기 위해 교회가 존재한다고 잘못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이야기를 잘못 알면, 가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기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알지만 정작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모르게 된다. 우리가 사회에게 건네는 빵이 적어도 빈곤과 목마름이어서는 안 되겠다. 예수님은 인간이 누구이고, 악이 무엇이며, 슬픔이 뭔지 아는 인간의 아들로 오셨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일탈을 하신 것”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려는 기독교 복지는 예수님이 권위로 맹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그런 유가 아니다. 진정 슬픈 자들, 죽어야 할 자들, 먹고 마셔도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른 이들을 구하고 생명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교회의 역할을 육의 세계를 만족시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야 하며, 육을 넘어 영적 허기와 목마름을 채워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그는 “교회가 할 일에는 분명 마르다의 일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사회를 위해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들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에게 제일 급하고 중요한 것은 정치, 경제가 아니고 생명인 것”이라며 “생명을 놓치면 세상을 놓친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오직 하나님 말씀을 듣는 데 달려 있으며 이는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가 반드시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한국 교회가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걸어야 하며, 세상 끝날 때까지 걸어야 한다. 오늘과 또 다른 내일이 있어야 살아 있는 것이지, 똑같은 오늘을 되풀이하고 반복하고 주저 앉으면 고인물이 된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것, 말씀 공부에 참여하는 것, 이웃을 심방하는 것처럼 매일 하고 있는 단순하고 지루한 일상일지라도 계속해야 하며, 걷는 교회가 새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끝으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전 세계에 이른 과정을 돌이켜 보면, 예수님이 심으신 씨를 인류가 거두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예수님이 온 평생을 다해 걸으며 복음을 전하신 것처럼, 육의 양식을 넘어 영의 양식을 들고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함께 빵을 떼고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사회 속으로, 세계 속으로 온몸을 다 드려 참된 생명을 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라고 했다.
한편, 이어령 교수는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동사이사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명예위원장,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월간 <문학사상>의 주간으로 편집을 이끌었다.
또한,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대전 엑스포의 문화행사 리사이클관을 주도했으며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1980년 객원 연구원으로 초빙되어 일본 동경대학에서 연구했고, 1989년에는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소의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중앙일보> 상임고문과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으로 재직했다. 2022년 2월 향년 8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저서로는 <메멘토 모리>,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지성에서 영성으로>,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생명이 자본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