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교체를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 사이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시작되면서 공기업 인사권 문제가 갈등 요인으로 부각됐다.
문 대통령은 임기 막판까지 공기업 사장을 새로 임명하며 '알박기' 논란이 불거졌다. 현재 공기업 10곳 중 8곳은 사장 임기를 절반 이상 남겨놓고 있다. 윤 당선인으로서는 취임과 동시에 임명권을 행사하기 쉽지 않아 불편한 동행이 예상된다.
공기업 적자가 날로 커지는 등 방만한 운영과 보은 인사 논란이 끊이질 않는 상황에서 전문성을 갖춘 사장이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경영에 집중할 수 있는 인사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기업 36곳 중 30곳, 사장 임기 절반 이상 남아
20일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에 따르면 36개 공기업 중 새 정부 출범 후에도 사장 임기가 1년 6개월 넘게 남은 곳은 30곳(83.3%)이나 된다. 공기업 사장 임기는 3년인데 이를 모두 채운다고 가정했을 때 상당수가 차기 정부에서 임기 절반 이상을 보내야 한다.
연내 임기가 끝나는 공기업은 한국가스공사(7월)와 한국지역난방공사(9월) 단 두 곳뿐이다. 내년 중 임기가 끝나는 곳도 한국수자원공사(2023년 2월), 한국항만공사(2023년 3월), 한국도로공사(2023년 4월) 등 3곳에 불과하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공기업 사장 임명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는 곳은 손가락에 꼽힌다.
한국수력원자력 정재훈 사장은 다음 달 임기가 끝나지만 내부적으로 연임 절차를 밟고 있어 문 대통령이 임기 막판 임명권을 행사하면 내년 4월까지 자리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현 정부가 임기 6개월여를 남겨 놓은 작년 10월 이후 사장을 새로 임명한 공기업도 7곳이나 된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작년 10월), 한국철도공사, 대한석탄공사(이상 작년 11월), 여구광양항만공사, 주식회사 에스알(이상 작년 12월), 한국공항공사, 한국마사회(올해 2월) 등이다.
◆새 정부 들어서면 수장 바뀔까… 업무 올스톱
공기업 사장은 임원추천위원회에서 후보를 추천하고 공공기관운영위원회 심의 후 이사회에서 단수 후보를 내세우면 주주총회 의결을 거쳐 주무기관장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정부가 출자해 설립된 만큼 임명권을 가진 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인물이 수장에 오른다. 정권이 바뀌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교체되거나 스스로 물러나기도 한다.
현재 상당수 공기업 수장이 임기를 여유 있게 남겨 놓고 있지만 정권 교체 시기 혹시나 불똥이 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도 엿보인다. 사업의 연속성을 담보할 수 없어 손을 놓는 경우도 있다.
한 공기업 직원은 "(지금의 사장이) 임기를 한참 남겨 놓고 있지만 현 정부에 연결고리가 있어 정권이 바뀌고 나면 자리보전이 가능할지 모르겠다"며 "기존에 해오던 사업은 계속 진행하더라도 올해 계획한 신규 사업은 사실상 새 정부 출범 때까지 손을 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새 정부 출범 후 대대적인 교체를 단행하기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 초기 '환경부 블랙리스트' 논란이 재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은 박근혜 정권 때 임명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들에게서 사표를 받거나 사퇴를 종용한 것으로 드러나 파문을 일으켰고, 최근 대법원에서 실형이 확정되기도 했다.
◆정권 교체기 공기업 경영 리스크 상당… 전문성 최우선 삼아야
정권 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사 논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오로지 경영을 위한 전문성을 갖춘 인사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600조원에 달하는 막대한 공기업 적자와 노사 담합에 의한 철밥통 논란, 도덕적 해이 등 깊게 박혀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강도 높은 개혁 드라이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공기업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수장 교체의 명분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내부 승진 발탁이 아닌 이상 조직의 특성을 이해하고 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이제 막 적응을 마친 기관장을 정권 교체를 이유로 대거 교체할 경우 새로운 기관장이 부임해 적응하고 성과를 내기까지 상당한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임기 말 대통령이 계약이 만료되는 공기업 사장을 교체하기보다 새 정부가 임명권을 행사하도록 공석으로 둬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럴 경우 막대한 경영 리스크를 감내해야 한다.
김기찬 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는 "공기업 특성상 최종 결정권자가 없으면 사실상 업무가 마비되다시피 하는데 대표직을 몇 개월씩 비워놓고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정권에 맞는 코드 인사를 위해 이러한 기업 리스크를 안고 간다는 것은 정부가 적자나 방만 경영을 방조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새 정부에서는 이러한 논란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공기업 인사를 할 때 전문성을 최우선으로 하고, 정권 교체여부와 상관없이 경영 성과에 따라 임기를 보장받을 수 있는 명확한 시스템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