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장에는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지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주의 나라에서 자식들을 좌우에 앉혀 달라고 청탁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대화를 듣고 분개하는 제자들을 보시고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따로 세우셔서 매우 강한 도전의 메시지를 던지신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26-27)"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자식을 청탁한 행위는 어찌 보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 인간 군상들의 보편적 민낯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어머니의 행위는 유대의 사회적 상황과 문화적 토양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정치권력에 의한 경제적 수탈과 성전권력에 의한 종교적 억압 상태로 인해 권력에 대한 분노와 갈증이 동시에 심화되고 있었다. 원래 세상 권력이 작동하는 곳에서는 기득권 중심부에서부터 그 아래로 하위계급이 형성되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부조리와 불공정이 가중되면서 권력에 대해서 증오와 질시라고 하는 이중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권력은 종종 '자리'로 비유된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도 예수님께 나아와 두 자식의 자리를 보장해 줄 것을 청탁했다. 그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경고 메시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 알거니와"(26) 이 경고의 메시지에는 권력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그 권력의 영향권 아래 있는 사람들을 "주관하고 그들에게 권세를 부린다"고 했다.
주관한다는 말은 주관자 맘대로 강제하고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당하는 쪽의 자유와 권리는 무시되고 오직 주관하는 쪽의 의도와 욕구만이 작용한다. 권력의 생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권력의 연속체 현상'이라 설명한다. 즉, "에고는 타자에게서 자신의 결정을 실현하고 그를 통해 타자 속에서 자신을 연속시킨다는 것이다.(한병철, 2012: 22)" 일반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욕망은 시간과 공간 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한계에 머문다.
따라서 이를 확장하고 그 제한을 해체하여 자기 욕망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충동을 갖는다. 이 충동은 권력을 통해 실현이 가능하다. 권력자의 이런 욕망 실현 의지를 가리켜 "권세를 부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권력자의 욕망 실현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게 만들고 권력을 자기가 지닌 자체 능력으로 오인하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 착각은 환각적인 상태를 가져오고 이런 상태의 지속을 가리켜 권력의 중독성이라 말할 수 있다. 이 중독성은 나이와 성별을 따지지 않는다. 세상의 통치자들이 한 번 권력을 잡으면 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 사회에는 권력의 생리를 따라 권세를 부리는 권력형 리더가 주종을 이룬다. 어떤 의미에서 세상에는 권력형 리더만이 존재한다고 해도 크게 과장된 말은 아니다. 초심은 달랐다고 해도 모든 리더는 결국엔 권력의 생리를 그대로 반영하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고매한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 더러 존재하기도 한다. 세상이 어지러운 때 간혹 의로운 인물이 출현하여 사익이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大義)를 위해서 자신을 헌신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다. 또한, 상황이 어렵고 불리한 데도 개의치 않고 보람된 일을 위해 뛰어드는 사람이 초기엔 있을 수 있다. 그러다가도 모든 여건이 좋아지고 특권을 누릴 수 있는 때가 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득권을 주장하게 되고 과거의 고생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권력의 환경에 노출되고 자연스럽게 권력형 리더가 되는 것이다.
권력형 리더 중에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강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권력이 지닌 기회와 조건을 활용하여 능동적 추종자들을 발생시키는 경우도 있다. 후자를 가리켜 권력에 대한 '무의지적 추종 유도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많은 경우에 권력이 강할수록 사람들은 맞서지 않고 스스로 능동적으로 그 권력에 순종한다. 여기서 강력한 권력은 타자의 행동반경에 영향을 주거나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부정적 제재 없이도 타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권력자의 생각을 수용하는 쪽으로 흐르게 한다. 따라서 강한 권력자들은 역사 속에서 오히려 영웅으로 추앙 받거나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권력은 커질수록 수하에 있는 자들에 대한 의존성이 높아진다는 역설도 나타난다.
권력이 커질수록 조직의 규모도 커지게 되는데 증가하는 복잡성으로 인해 사안에 대한 결정에 있어서 그 분야의 전문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고 이 과정에서 조언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과 자연스럽게 권력을 나누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어떤 권력자도 모든 사안에 대해 모든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권력자가 있다면 그 권력은 오래가기 어렵다. 따라서 조직이 커질수록 단일 권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권력 그룹 혹은 권력 시스템이 존재할 뿐이다. 만일 큰 조직 안에 권력 분산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권력자는 모든 것을 다 책임져야 하는 위험한 상황을 자초하는 쪽으로 귀결될 수 있다.
권력형 리더에게서 나타나는 리더십의 특징은 종교 상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는 종교계에서도 권력 암투가 상존해 왔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중간기 유대 사회에 출현한 대표적인 두 종교 집단으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있었다. 사두개파는 성전의 제사장 귀족들로서 유대교의 성전권력을 중심으로 권세를 누렸던 집단이었고, 바리새파는 율법주의를 이용하여 서민 백성들을 자신들의 손아래 통제함으로써 세를 과시했던 집단이었다.
이들의 행태는 권력에 대한 강한 집착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사두개파가 성전권력을 독차지 하고자 했던 것은 재리와도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다. '사두개'란 이름에 대해서는 다윗 시대에 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유래되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들은 줄곧 제사장으로 이어져 왔고 마카비 시대에 대제사장 가문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헬라계 시리아 왕국인 셀류시드 왕조에 의해 팔레스틴의 헬라화가 가속화 되는 과정에서 외세에 협조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종교적 정치적 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외경인 마카비 상편에는 이들이 정치적 힘을 누림에 따라 종교적 열망은 사라지고 조상들의 종교 유산에 대한 변절자들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마키비상 1:15).
이들은 수적으로는 적었어도 정치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세력을 펼쳤던 귀족층이었다.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는 보수주의자들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진보주의자들이었다.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전통종교문화의 기득권과 신흥 정치권력, 양쪽 모두에 대한 강렬한 집착에 기인하였다.
대개 종교적 보수가 정치적 보수와 결합하는 일이 많지만 사두개인들의 경우에는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권력 유지에 있었기 때문에 어떤 정치 그룹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력과 협력했다. 이것은 앞서 소개한 강력한 외세 권력에 의한 '무의지적 추종 유도 기능'이 드러난 종교집단 사례라 할 것이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헬라화가 극에 달하던 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의 전통 종교문화를 고수하려던 하시딤(경건한 사람들) 세대의 후예들 중에서도 특별히 분리주의적 태도를 지녔던 무리들로 구성되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이들은 전통적인 종교의식 수행이나 율법 해설에 있어서 새로운 해석을 가했던 종교 집단이었다. 이들은 줄곧 청중을 가르치면서 서민들과의 접촉이 빈번했기 때문에 백성의 삶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이는 바리새파가 서민들을 등에 업고 종교세력 뿐 아니라 정치권력에도 영향을 행사하는 상황을 낳았다. 구체적으로 바리새파는 하스모니안 왕조 내내 사두개파와 권력 암투를 벌이며 중간기 후반에 유대 사회 전반에 걸쳐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수많은 문제를 낳았다. 특히 바리새파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왕자의 왕위 계승을 위해 사두개파와 불꽃 튀는 투쟁을 벌였다. 이 양파의 권력암투는 수많은 사상자를 동반하는 사태로 이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 크나큰 악영향을 끼치면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고 외세 침략의 도화선을 제공하는 꼴이 되었다. 이로써 하스모니안 왕조가 더욱 쇠락의 길로 내딛게 되는 계기를 열어 주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하스모니안 왕조의 파국에 한 원인 제공자들이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종교적 권력 다툼은 단순히 종교 내부갈등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의 집단 영향력의 크기에 따라 때로는 국가적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종교권력이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것은 매우 위험천만한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이런 결합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공동체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종교 집단의 권력화는 언제나 공동체의 운명에 치명적인 결과를 만든다.
둘째, 종교 지도자 그룹의 문화는 그들을 추종하는 집단의 삶 전체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권력형 리더십의 부산물이 아닐 수 없다. 종교 리더 그룹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어떤 지향점을 지니고 있느냐 하는 것은 그 리더십이 미치는 반경 안의 사람들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어 있다. 유대 사회에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만들어내는 리더십은 각 집단 안에 내재하는 문화에 기인하고 그 문화는 그 집단의 정체성에서 비롯되었다. 문제는, 이 두 집단이 지닌 정체성은 그들의 무의식 속에 권력의지가 작용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왜곡된 종교 현상을 지속적으로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 권력과 진배없는 양상으로 또 하나의 권력형 리더십 문화 현상에 해당된다.
권력형 리더십의 이야기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재현되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교회의 성직제도의 출현이다. 주 후 313년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사회에서 성직자의 지위는 점차 상류계급의 하나로 여겨져 갔다. 로마 제국 안에서 기독교의 위상이 상승되면서 각 지역의 주교는 행정관에게 주어지는 예우와 특권을 부여 받았다.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이제 로마사회에서 특별한 지위를 얻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여건 변화는 오히려 기독교계에서 계급화 된 성직 제도의 정착을 견고하게 만드는 사태로 이어지게 하였다. 권력은 지위나 신분, 계급과 계층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이기에 계급화 된 성직제도야 말로 권력 의지의 발동에 유리한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강제적 기제가 가능한 권력형 리더십을 낳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상향 계층이동을 시도하는 이유는 높은 위치에 오를수록 낮은 계층보다 우월한 힘이 주어지고 이로 인해 타인을 통제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권력형 리더들에게 주어지는 기득권이 성직자들에게도 주어지자 세상의 권력이 작동하는 원리가 교회 내에서도 그대로 반영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중세 교회가 성경의 섬김 원리에서 벗어나 인간 권력의지에 의한 억압적 질서 세계를 구축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중세 성직자의 특권화가 교회 내부에 세속 현상을 가속화시키는 토양이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들이 많다. 특히 신앙적 동기가 아닌 세속적 동기를 지닌 사람들이 사회적 계층 이동 수단으로 성직을 활용하면서 불순하고 부도덕한 현상들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성직이 곧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직자들은 교회 사역이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양 주도했고 이를 종교적 힘의 원천으로 삼았다. 권력은 커질수록 부패와 오염의 정도가 심해지기 마련이다. 중세 교회에서 권력형 성직자들이 보여준 행태는 세속 권력자에게서 볼 수 있는 온갖 일탈 행위 그대로였다.
사회 속의 권력 남용은 대개 금전문제와 성문제로 귀결된다. 권력이 있으면 돈이 들어오고 돈과 힘이 생기면 성에 탐닉하는 것이 속된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다. 바로 이러한 문제가 중세 교회 내에서도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금전문제와 관련된 타락은 성직매매를 통해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성직매매는 대개 계급구조의 토양 속에서 출현하게 되는데 더 높은 사제의 지위를 얻는 데 필요한 금전을 마련하기 위해 다수의 사제들은 교회의 전례 의식을 집전하는 데에도 금전적 대가를 요구했다.
중세 후기 성직매매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마인츠에 근거지를 둔 브란덴부르크 왕가의 알브레히트 왕자 이야기가 있다. 그는 왕족이었지만 종교권력에도 강렬한 욕구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주고 주교 자리를 샀다. 그러나 거기에 만족하지 못했던 알브레히트는 더 높은 성직 자리를 얻기 위해 로마교황에게 엄청난 금전 지불을 약속하고 대주교 자리를 꿰찼다.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그가 한 짓이 바로 면죄부 판매였다.
사실, 부조리한 계급화를 낳는 성직제도는 권력 집중현상에서 비롯된다. 실제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신분차별, 성직자에 의한 교회 주요기능 독점, 성직자의 직급 세분화 등은 성직집단에 모든 권력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성직제도와 교권주의는 분리될 수 없는 한 몸인 셈이다. 물론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여러 제도적 장치를 통과하여야 가능하다. 그러나 그 제도적 장치라는 것은 초기에 지녔던 동기와 의도와는 별개로 움직여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직제도에 의한 계급화는 결국 신앙 원형을 훼손하게 된다. 가톨릭이든 경직된 개신교회든, 중세이든 현대이든, 교회 내에 정상적인 영성 흐름이 차단되면 부조리한 현실에서 계급 상승에 대한 욕망만이 더욱 강화되는 쪽으로 흐르게 된다.
다시 말해, 본질이 상실된 경화된 집단 안에는 신앙의 참된 헌신은 점차 사라지고 상층부를 향한 욕망과 기득권에 대한 집착만이 심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종교 집단이라 하더라도 진정성이나 순전함을 찾아보기 어렵고 오직 불타는 성취감과 권력남용만이 자리한다. 이것이 종교 집단 내부에서도 나타나는 권력형 리더십의 실체인 것이다.
그렇다면 권력형 리더십과 대비되는 귄위형 리더십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권위형 리더십이란 권력의 상하관계에 따라 힘의 논리가 작용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삶의 본을 지닌 리더의 태도, 정신, 관계 등이 자발적 추종 동기를 일으키는 가운데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말한다. 20세기 전반기 미국에서 행정 경영 이론가로 잘 알려졌던 체스터 버나드(Chester Irving Barnard,1886-1961)는 대표적인 저서인 The Functions of the Executive 의 12장 "The Theory of Authority"에서 "지위에 의존하는 권위는 권위주의를 낳는다"고 하였다. 직책이나 계급에 의해 얻어진 권력은 권위주의적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다.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어떤 일을 권위[지위권력을 뜻함]에 맹목적으로 의지하여 해결하려고 하는 행동 양식이나 사상, 자신보다 상위의 권위[지위권력을 뜻함]에는 무의지적으로 따르는 반면, 하위 대상에게는 오만하게 행동하려는 심리적 태도나 생각"을 말한다. 체스터 버나드의 말에서 지위로 인한 귄위는 제도적인 법적인 권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실상 권력을 말한다. 따라서 힘의 논리에 의한 권위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상정하려고 하는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권위와는 별개의 것, 즉, 권력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제도나 법에 의한 권위처럼 강제성을 동반하는 권위와는 달리, 자발성을 불러일으키는 권위는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추종자들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발적 추종을 이끌어 내는 권위는 추종자들에게 1)참신한 관점, 2)감동적 정서, 3)실천적 동기 등을 불러일으킨다. 참신한 관점 제공이란,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주고 무딘 정신을 각성시키며 보지 못하던 것에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저마다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생각하고 판단하기 마련이다.
소위 고정관념이라는 것은 사람의 성장과 발달을 저해하고 삶을 경도시키거나 왜곡시키는 원인이 된다. 무엇보다도 개인 안에 숨어있는 잠재가능성을 소멸시키는 위험한 장애요소이기도 하다. 반면에 참신한 관점은 이러한 문제 요소들을 말끔히 제거시킨다. 우리 안에 참신한 관점이 심어지면 그때부터 정신적·지적 성장이 가능하게 된다. 새로운 관점을 심어주는 것과 함께 감동을 주거나 동기를 유발시켜 주는 것 역시, 자발적 추종자들을 만들어낸다. 한때 박세리 키즈, 김연아 키즈 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박세리, 김연아 등과 같이 탑 클래스의 선수들은 그 분야의 전문적인 운동 실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분야에 관심 있는 키즈들은 그들의 훈련 모습만 보아도 엄청난 감동과 본받고자 하는 동기를 얻는다. 감동과 동기는 인간 내면의 정의(情意)적 요소로서 모방 행동을 유발시키고 선망하는 대상을 따르고자 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추종은 단지 스포츠 스타를 본받고자 하는 키즈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 아니라, 권위를 드러내는 여러 국면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권위를 지닌 리더들의 모습은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모세는 이집트 공주의 왕자로 있을 때 엄청난 권력을 지니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권력 앞에서 굴종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권력이 흔들리자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유대인 노예들마저도 그의 보좌가 흔들린 것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모세의 살인 사건을 들먹이던 유대인 노예의 말 속에는 모세를 무시하는 듯한 말투가 배어 있다. "누가 너[모세]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출2:14) 그러나 훗날 미디안에서 돌아와 하나님의 사자라는 자명한 실제 증거들이 드러나자 놀라운 권위를 얻게 되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자발적으로 따랐던 것이다.
그의 예언대로 하나님의 기적들이 일어나자 모세는 강력한 영적 권위를 얻었다. 이는 세상 권력과 차별화 된 자발적 추종을 가져왔다. 여호수아는 40년간 모세의 몸종으로 헌신하며 모세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경험했다. 그에게는 모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그는 모세 옆에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을 경험했고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전장을 누비며 모세에게 임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재현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주었던 동일한 권위를 여호수아에게도 선물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렇듯 권위는 추종자들이 인정하는 자에게 바치는 자발적 선물이다.
신약교회에서도 권위형 리더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은 직분이란 원한다고해서 아무에게나 주어졌던 것이 아니고 은사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나가는 자들에게 주어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에베소서 4장에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도자와 목사와 교사(11절) 등과 같은 직분들을 설명하면서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은사]를 주셨다(7절)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직분자로 세워지기 전에 먼저 그 개인에게 그리스도가 부여하신 은사가 전제됨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직분이 주어진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한 사람의 은사에 따른 사역의 결실을 보고 그것을 인정한 결과였다.
신약에서 12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 동안이나 동행하는 가운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며 그분의 부활과 승천을 두 눈으로 목격했던 인물들이었다. 예루살렘 신앙 공동체가 한 결 같이 사도들의 가르침에 강력한 권위를 인정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 사도들은 실제적으로 주님을 경험했다는 면에서 특별한 권위가 주어졌던 것이다. 특히,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분명히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사도들 스스로 만들어 낸 권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비롯된 권위였다.
더 나아가 직분자의 권위는 인격적 열매가 함께 할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목회서신에서 제시하고 있듯이 감독과 집사가 지녀야 할 윤리적 기준은 직분자의 권위와 관련된 인격적 속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인격적 열매는 직분자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리더의 권위와 관련되어 있다. 목회서신에서 감독과 집사의 직분을 얻게 될 자들의 자격에 대한 말씀 가운데는 개인의 프로필을 다루는 내용이 단 한 건도 제시되지 않는다. 한 결 같이 인격의 모습과 삶의 태도에 주목한다.
이것은 교회의 직분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세상의 경력이나 학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직분자를 세운다는 것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자를 뽑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인기 있는 직업 경력자를 세우는 것도 아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기 스타 같은 인물을 끌어와 세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회의 직분자에게 참으로 필요한 요건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성령 충만의 경험 가운데 내면화된 인격적 증거이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령의 성품 열매를 거두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에 의해 다듬어진 삶의 경험자들인 것이다. 바로 이런 인물들에게 영적인 권위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그리스도의 흔적으로부터 비롯된 권위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주목하는 신앙에 기초한 진정한 권위형 리더십이다.
이와 같이 직분자는 성령에 의해 주어진 은사와 성품에 근거하여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성경 원리는 우리의 교회를 돌아보게 한다. 과연, 우리 교계에서 성경의 자명한 원리에 따라 선별된 리더들이 세워지고 있다고 자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로부터 낯 뜨거운 시선을 받고 있는 한국 교계의 여러 기현상은 사실상 성경적 원리들을 외면한 채, 인습적 관례에 매몰된 결과가 아닐까? 그렇다. 사실상 현재 한국 교회에서 직분자가 세워지는 양상을 보면 성경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관행적인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그 세워지는 과정은 결코 성경에서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모습들뿐이다. 몇 편의 형식적인 서류들과 피상적인 인터뷰만 거치면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끝나버리는 안수과정은, 관리감독이 부재한 공장에서 선별되지 않은 재료로 제품을 마구 찍어내는 모습이 연상된다.
이런 현실 가운데서 배출된 목회자와 직분자로부터 어떻게 참된 성경적 원리를 투영해 내는 리더십이 나올 수 있겠는가? 어떻게 진정한 권위를 지닌 리더의 선한 결실들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 교계의 현실은 그 첫 단추부터 잘못 껴진 본질 상실의 문제라 아니할 수 없다. <계속>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 침례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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