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우크라이나 사태가 먼 나라, 남의 얘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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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전 세계를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냉전 시대로 회귀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국제사회의 단호한 대응 천명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평화’의 결말을 보는 우리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이유 없고 정당하지 않은 공격에 대해 세계가 러시아에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미국과 동맹국들의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혔다. 이어 유럽연합(EU)과 일본 등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는 등 국제사회가 결속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북한을 마주 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유엔 안보리가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제 역할을 못하는 데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경제제재 수단 외엔 마땅히 대응할 카드가 없는 현실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까 염려되는 점도 있다. 북한이 베이징 올림픽 기간에 중단했던 탄도미사일 도발을 지난 27일 오전 다시 재기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에 의해 함락 직전에 있는 우크라이나의 안보 현실을 보며 복잡한 심정이 드는 또 다른 이유는 말 뿐인 ‘평화’가 얼마나 위험한가 하는 점이다. 우크라이나는 8년 전 러시아의 침공으로 크림반도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으면서도 오늘의 사태를 대비하기는커녕 ‘평화’ 타령만 해왔다. 1994년 구 소련에서 분리될 당시에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를 러시아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미국과 영국, 러시아가 안보를 책임져주기로 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거란 평가도 있다.

러시아의 전면적인 침공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8년 전 러시아와 맺은 ‘정전협정’을 상기시키며 또 다시 “평화”를 외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약육강식의 정글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정치에서 ‘협약’ ‘선언’ ‘양해각서’ 등만 믿고 대응할 힘을 기르지 않았다면 순진한 게 아니라 어리석은 것이다. 결국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하며 한 말대로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나라를 위해 대신 싸워줄 나라는 없다”는 냉엄한 현실이 다시한번 증명된 셈이다.

정부는 미국과 유럽, 일본이 경제재제의 동참을 속속 발표하는데도 처음엔 러시아의 무력 침공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그러다 24일에서야 유감을 표하고, 국제사회의 결의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청와대와 정부가 한발 늦게라도 서방세계의 제재에 동참하기로 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만약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느라 제재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거나 더 늦었다면 국제적인 고립을 면치 못하게 됐을 것이다.

청와대와 정부가 러시아의 침공에 대해 처음부터 즉각적이고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못한 이유는 러시아와의 관계 때문일 것이다. 우리 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문 대통령이 재임 5년간 줄기차게 추진해온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와 임기 말을 앞두고 미련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종전선언’에 미칠 부정적 영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런 분위기는 여당의 대선후보 유세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 민주당 대선후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우크라이나는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이야기”라며 “그런데 주가가 내려가고 있다. 전쟁이 아닌 평화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소련의 붕괴는 냉전시대의 종말을 함께 가져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과거 냉전시대로의 회귀를 우려할 만큼 국제사회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도 여당 후보가 전 세계적인 위기 상황을 ‘먼 나라 남의 나라 얘기’ 정도로 표현한 것은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지나치게 안이한 단편적 시각이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국가 간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며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한 사실은 북한의 전쟁 도발에 대비하는 우리의 안보 현실에서 결코 남의 일도 먼 나라의 일도 아니다.

이런 시각에 대해 윤석열 국민의 힘 대선후보가 “단지 지구 반대편 나라의 비극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강대국에 둘러싸인 우리에게도 생생한 교훈이 되는 일”이라며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윤 후보는 그러면서 “말로만 외치는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이 한반도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며 문 정부와 여당을 동시에 겨냥했다.

‘평화’는 매우 소중한 가치이다. 일제 강점기와 6.25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의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이 소중한 가치를 말과 이상만으로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일제 국권 침탈과 6.25 전쟁을 통해 뼈저리게 체득했다. 지킬 힘이 없는 ‘평화’의 신세란 유리잔보다 못한 처지라는 것을.

문재인 정부는 지난 5년 동안 줄곧 ‘평화’만 부르짖어왔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은 이런 ‘평화’노래에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로 화답해 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8년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남북이 지난 70년 적대를 완전히 청산하고 다시 하나가 되기 위한 평화의 큰 걸음을 내딛자”고 연설해 15만 평양 군중의 박수를 받았다. 그 시간에도 북한은 ‘평화’ 대신 핵무장과 전쟁 준비에 올인했다.

내일은 3.1만세운동 103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 선열들은 103년 전 그날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맨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마치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오늘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 국민이 겪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게 결코 강 건너 불구경, 남의 나라 얘기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말 뿐인 ‘평화’로 나라를 또다시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 수는 없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미동맹의 든든한 바탕 위에 반드시 힘의 우위를 유지해야만 그 소중한 평화를 지켜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